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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해설40

34.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청마靑馬 유치환 柳致環 고독은 욕辱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目)을 에이고, 땅바닥 옥獄엔 무쇠 연자碾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2021. 12. 5.
33. 떠나가는 배 떠나 가는 배 -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ㄴ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시인과 문학평론가, 번역가, 연극운동가로 활동했던 박용철朴龍喆(1904~1938)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호남은행에서 근무했던 박하준씨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두 형들이 요절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장자.. 2021. 12. 5.
32.돼지들에게 돼지들에게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나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그의 이름.. 2021. 12. 5.
31. 단풍 - 이제하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生鮮)처럼 뒤채며 살려던 목숨이 어째 볼 수도 없는 허공(虛空)에서 아으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잎잎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상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에서 하늘 끝에서 되돌아 아뜩아뜩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군데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잽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청하,1982)- 【해설】 가을이 오면 누구나 잠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가을에 느끼는 감흥은 봄의 신록과 여름의 무성함 그리고 가을의 조락(凋落)이라는 자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가을철 단풍의 온통 화려한 색채는 더욱 시인의 시정을 자극하는 듯하다. 단풍.. 2021.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