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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89

84.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 김사량 왕백작 우리들은 부산발 신경행(新京行) 급행열차 식당 안에서 비루병과 일본술 도쿠리를 지저분히 벌여 놓은 양탁을 새에 두고 앉았다. 마침 연말휴가로 귀향하던 도중 우리는 부산서 서로 만난 것이다. 넷이 모두 대학동창이요 또 모두가 같이 동경에 남아서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광고장이, 한 사람은 축산회사원, 한 사람은《조선신문(朝鮮新聞)》동경지국 기자, 그리고 나. 우리들은 기실 대학을 나온 이래 이렇게 오랜 시간 마주앉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 우리는 만취하기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술에도 담배에도 이야기에도 시진하였다. 그때에 신문기자는 이 열차에 오를 적마다 머릿속에 깊이 박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노라 하며 다.. 2022. 5. 26.
83. 행복할 때 나는 눈을 감는다. 행복할 때 나는 눈을 감는다 김봉순 ​ ​ 한겨울 새벽녘 뭔가가 하늘에서 나풀거리며 내리던 도로를 가로질러, 찬바람을 뚫고 병원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응급실로 직행한다.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았으나 나는 혼자 왔다고 말한다. 간호사는 마치, 이 상태로 어떻게 혼자 왔냐는 듯 어깨를 한번 들어 두 팔을 벌리며 놀라는 시늉을 한다. 그는 지난 달 중순께 집을 나갔다.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나 나나 자기 위치를 자세히 얘기하지 않는다. 아니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그것은 오래 된 우리 생활 방식이다. - 좆 붙어먹은 년 빤스 핥어 먹은 놈아! 어디서 에미를 이런 식으로 응? 이게 무슨 소린가? 처음엔 나는 내 귀를 가만히 두드려봤다. 분명 잘못 들은 거다. 편두통으로 인한 진통제.. 2022. 5. 26.
82. 화랑의 후예 화랑의 후예 -김동리 1 황 진사(黃進士)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해 가을이었다. 아침을 먹고 등산을 할 양으로 신발을 신노라니 윗방에서 숙부님이 부르셨다. "오늘 네, 날 따라가 볼래?" 숙부님은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오시며 이렇게 물었다. "어디요?" "저 지리산에서 도인이 나와 사주와 관상을 보는데 아주 재미나단다." "싫어요. 숙부님께서나 가슈." 나는 단번에 거절하였다. "왜, 싫긴?" "난 등산할 참인데……." "것두 좋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한번 따라와 봐……. 무슨 사주 관상 뵈는 게 재미나단 말 이 아니라, 그런 데서도 배울 게 있느니……. 더구나 거기 모여드는 인물들이란 그대로 조선의 심 벌들이야." "조선의 심벌요?" 나는 반쯤 웃는 얼굴로 이렇게 물은즉, 숙부님도 따라 .. 2022. 5. 26.
81. 환상 여행 환상(幻想) 여행(旅行) -정소성 그는 친구 억(憶)이 여지껏 제주도에 살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듯 멍한 표정에 붙잡혀 있다. 시외전화 접수부에 앉은 아가씨는 좨나 무관심한 표정을 주위에 흘리고 있다. 전화국 청사는 파도의 물빛에 반사되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빛났다. 접수부에 앉은 아가씨의 전신에서는 땟국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땟국물 위로 시선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피로와 그녀의 가난과 이 퇴락한 항구의 살벌함을 생각했다. 그녀의 인중, 그 빈약해빠진 윗입술의 홈 속에 돋아난 검은 사마귀는 고의 이런 순간적 생각을 급작스레 욱죄여주는 것 같아,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억은 지금도 제주도에 살고 있을까. 과연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을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그는.. 2022.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