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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89

80. 하늘 아래 그 자리 하늘 아래 그 자리 -전상국 1 수려한 강산의 한여름 그 푸름 속으로 구불구불 그림처럼 뻗어 나간 하얀 길 위를 걷고 있었다. 강의 흐름을 따라 굽이굽이 절경을 이룬 협곡의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 틈틈이 허공을 향해 가지를 펼친 노송과 갈참나무 고목들, 더 안쪽 기슭으로는 무슨 나무라 가릴 것 없이 한데 어우러진 숲이었다. 그 울울한 녹음 밑을 돌돌 굴러 내린 골짜기 물이 강바닥 돌이끼까지 선명히 흐러내리는 해맑은 강물에 허리를 질러 합류하고 있었다. 부채꼴로 펼쳐진 흰 모래밭이 물빛을 더욱 푸르게 했다. 그 청청한 강물까지 내려가 몸을 담그지 않아도 가슴은 아름다운 강과 산 속에 숨쉬고 있다는 흥분으로 하여 차라리 그 외경스러움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에, 목에, 등줄기를 타고 땀이 비 오듯.. 2022. 5. 26.
79. 크라인씨의 병 크라인씨(氏)의 병(甁) 조세희 은강에는 장님이 많았다. 은강에 살면서 놀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공업 지역에서는 물론 볼 수가 없었다. 시가와 주거 지역을 거닐다 나든 알았다. 어느 날 나는 십 분 동안에 다섯 사람의 장님을 보았다. 다음 십 분 동안에는 세 명을 보았고, 그 다음 십 분에는 나의 발 옆을 두드리며 지나는 둘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시간이상을 헤매고도 단 한 명의 장님을 볼 수 없는 도시가 세계에는 있을 것이다. 은강에 유독 장님이 많은 까닭을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장님이 많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시대에 자란 사람들 중에 장님이 많다는 사실을 은강 사람들은 몰랐다. 그래서 은강 사람들 모두가 장님으로 보일 때가 .. 2022. 5. 26.
78. 제도의 덫 제도(制度)의 덫 -정을병 그는 거울 조각 끝으로 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었다. 칫솔대에다가 아름다운 여자의 나체를,,,,,, 거울 조각은 닳아서 손톱 크기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두 손가락 사이에다 넣으면 거울은 전연 보이지 않았다. 유리의 뒷면에 은칠이 되어 있었지만 거의 벗겨져서 그냥 유리 조각인지 거울 조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조각은 아주 정교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직업적인 조각가가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조각은 시간과 싸우는 작업이며, 혼신의 정력을 쏟아서 만드는 일이었다. 새끼손가락 굵기밖에 안 되는 칫솔대지만 마치 거대한 실물크기의 조가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풍부한 머리는 풀어서 뒤로 젖혀 가지고 있었고, 두 팔을 위로 .. 2022. 5. 26.
77. 전황당인보기 전황당인보기(田黃堂印譜記) -정한숙 1. 석운(石雲) 이경수(李慶秀)가 선비로서 야인(野人) 시절이랄 것 같으면 문방사우(文房四友)중 무엇이든 들고 가서, 매화옥(梅花屋) 뜰 한가운데 국화주(菊花酒) 부일배로 한담소일하면 옛 정리 그에 더할 것 없으련만, 석운이 벼슬을 했으니 지(紙) 묵(墨) 연(硯)을 즐길 여가가 있을 것 같질 않았다. 정표(情表)라기보다도 수하인(受荷人) 강명진(姜明振)은 벼슬한 친구에게 기념이 될 만한 것을 꼭 선사하고 싶었다. 애당초 시속적인 물건은 고를 생각도 없었고, 그것은 석운의 구미에도 맞을 것 같질 않았다. 석운에겐 물론, 자기 자신의 성미에까지 들어맞는 것을 골라내자니 매우 힘들었다. 연(硯)이라면 집에 있는 단계연(端溪硯)이 알맞겠지만, 그것만은 수하인으로서도 내놓을.. 2022.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