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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105

길 / 박영자​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말도 있지만, 환경에 따라 사람의 버릇도 무시로 변하는 모양이다. 젊어서는 혼자라는 것에 대한 외로움이 두렵기만 하더니, 이제는 여럿보다는 혼자가 좋고 번잡보다는 호젓한 것이 더 좋아졌다. 정신과 의사는 이런 증세를 우울증의 초기라고 하는 모양인데, 풀기 없이 늙어 가는 심경의 변화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혼자되는 종착역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외국 여행은 아니더라도 팔도강산 이곳저곳을 마음 맞는 친구와 노숙이라도 할 각오로 집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너나없이 바쁜 요즈음 불쑥 솟구치는 나의 감상(感想)을 이해해 줄 리는 없고 떠난다고 해도 내 재미가 곧 상대방의 재미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려서 길을 .. 2023. 1. 30.
파경 파경(破鏡) / 조정은 토요일 오후,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에서 철학자들의 현상학에 관한 컬로퀴엄이 있었다. 이 학회의 회장인 지인의 초대로 참석은 했으나 흥미를 기대하진 않았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토론이라지만 비전문가인 나로선 이해도 쉽지 않을 테고 골치 아플 게 뻔했다.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니 뒷자리 하나 채워주다가 슬쩍 빠져나오리라는 생각이었다. 강당으로 들어서자 참석자가 몇 안 되어 일단 놀라웠고, 나 빼놓고는 모두가 전문가들이란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주제발표자는 전북대 심혜련 교수로 이란 제목이었다. 이 재미없는 제목은 또 뭔가, 하여튼 철학가들이란 은유를 몰라요, 시큰둥하게 앉아서 발표자의 목소리보다 빠르게 인쇄물을 읽어나갔다. 나는 어느새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포스트 디지털시대’라는 .. 2023. 1. 24.
먼길 먼길 / 노혜숙 나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지극히 내성적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감성이 넘쳤다. 밴댕이처럼 좁은 속은 아니었으나 하해처럼 넓은 속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바빴고 나는 외딴 밭 옥수수처럼 제풀에 자랐다. 내가 부쩍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것은 엉덩이에 뿔이 돋을 무렵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건초 더미에 누워 있으면 왠지 동산 위에 반쪽자리 달처럼 허기가 졌다. 어둑해지도록 안방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올해도 흉년이 들어 조합 빚을 다 갚지 못할 거라는 아버지의 한숨 섞인 말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친구들이 밤톨만 한 젖가슴을 내놓고 멱을 감을 때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일찌감치 알아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과,.. 2023. 1. 23.
처갓집 벌초 처갓집 벌초 / 김길영 먼동이 트자마자 출발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쉬긴 했지만 세 시간 반을 달려갔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억새들이 천여 평의 산소를 뒤덮은 채 하늘거렸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억새는 하늘거리며 반기는 모습이 역역했다. 제수씨가 추석에 산소를 다녀와서 다짜고짜 나에게 항의를 해대었다. 금년에는 왜 벌초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당황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내용을 알아보니 산소 관리인이 지난봄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치료 중이라 했다. 추석 전에 묘 관리인에게 전화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우리 산소는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핑계 같지만 산소를 자주 찾아 뵐 기회를 갖지 못한다. 벌초는 예전부터 산소 관리인에게 .. 2023.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