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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105

찔레꽃 찔레꽃 / 강천 언제쯤에 새겨졌던 기억일까. 아직도 코끝에 간직되어 있는 아련한 향기를 느끼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저만치 담장 한쪽 귀퉁이에서 언제 보아도 반가운 자태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간다. 찔레꽃 한 무리가 날 보라는 듯 소담하게 피어서 방실거리고 있다. 곁에 핀 장미처럼 크고 원색적이지는 않지만, 단출한 꽃잎만으로도 나의 눈길을 받기에는 차고 넘친다. 꾸미지 않은 소박함이 마치 화장기 없는 민낯의 소녀처럼 수수해 보여서 더욱 정겹다. 찔레꽃 앞에 서서 나는 까마득한 그림자로 남아있던 하얀 그리움 하나를 건져 냈다. 봄바람을 타고 흐르는 꽃향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논두렁을 보고, 파랗게 이삭을 내민 보리밭 위를 날아다닌다. 장독대 뒤에 숨어있는 까까머리 동무를 찾아내고, 꿩 울음소리가 .. 2023. 3. 10.
운명을 훔치다. 운명을 훔치다 / 안정혜 아홉 살이던 가을, 나는 아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물건을 집어 온 일이 있다. 며칠 후 그 집 어른들은 용케도 그것을 찾으러 우리 집에 왔다. 그때 죄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바로 내드리고 나서도 울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양심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정말 그게 나쁜 짓인지 몰랐을까. 엄마한테 그 일로 매를 맞은 기억이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엄마는 엄히 타일러 주는 것으로 끝냈다. 동생이 보고 있었지만 부끄러운지 전혀 몰랐다. 그 나이 되도록 피란 다니느라 학교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앞으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전염병이 무섭다고 피난민 학교에 안 보내 주니 학교는 무서운 곳인 줄만 알았다. 이름자는 물론 아라비아 숫자도 읽.. 2023. 3. 10.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김훈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 2023. 2. 11.
할머니의 숟가락 할머니의 숟가락 / 이은정 겨울바람이 잦아들 무렵이었다. 미모의 신문사 기자가 우리 집에 방문한 일이 있었다. 기자는 현관 입구에서 신발을 벗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들어오시라고 하니 집이 너무 깔끔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누추한 거실 바닥에 자리를 내어 드렸더니 집이 참 단출하다고 한다. 자주 듣는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찬바람이 가슴속으로 훅 들어온다.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따뜻한 모과차를 내어주면서 이렇게 사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언젠가부터 당장 쓰지 않는 물건은 집에 들이지 않게 되었고, 들여놓았다가도 쓰지 않게 된 물건은 미련 없이 나누거나 버리는 습성이 생겼다. 운동화에 구두 한 켤레만 있으면 어떤 외출이든 불편함이 없고, 계절에 맞게 외출복 한두 벌 .. 2023.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