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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105

죽자고 글쓰기 죽자고 글쓰기 / 허창옥 ‘길’을 제목으로 하는 다섯 번째 글을 쓸 요량이었다. 소재로 앤터니 귄 주연의 영화 「길」과 황석영의 소설 「삼포로 가는 길」 을 선택했다. 글을 쓰기 전에 영화를 다시 보았고 소설도 한 번 더 읽었다. 단맛이 나도록 소재들을 오래 씹으면서 기다리는 동안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구성이 되었고 글이 나아갈 바도 정해졌다. 서재의 앞뒷문을 열어놓고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뺨에 와 닿는 바람이 선선하다. 새들이 재재거리는 소리, 아이들 왁자지껄 뛰노는 소리, 신천고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소리들이 창을 넘어 들려온다. 오수에 빠진 남편의 코고는 소리도 바람 따라 넘어온다. 그는 코를 골면서 자신의 존재를 시시각각 내게 알리고 있고, 나는 문자판 두들기는 소리로 스스로를 중명하고 있다. .. 2022. 12. 18.
주부송 주부송(主婦頌)- 김진섭 한말로 주부(主婦)라고는 해도,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형태로 꾸민, 말하자면 다모다채(多貌多彩)한 여인상을 안전(眼前)에 방불시킬 수 있겠으나, 이 주부라는 말이 가진 음향으로서 우리가 곧 연상하기 쉬운 것은 무어라 해도 백설 같이 흰 행주치마를 가는 허리에 맵시도 좋게 두른 여자가 아닐까 한다. 그러한 자태의 주부가 특히 대청마루 위를 사뿐사뿐 거닌다든가, 또는 길에서도 찬거리를 사 들고 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실로 행주치마를 입은 건전한 주부의 생활미를 한없이 찬탄하고 사랑하며 또 존경하는 바다. '먹는 자(者) 그것이 사람이다.' 하고 일찍이 갈파(喝破)한 것은 철학자 루우드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에르바하였다. 영양(榮養)이 인간의 정력과 품위를 결정하는 표준.. 2022. 12. 18.
보통 사람 보통 사람 / 박완서 남보다 아이를 많이 낳아 늘 집안이 시끌시끌하고 유쾌한 사건과 잔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다. 늘 그렇게 살 줄만 알았더니 하나 둘 짝을 찾아 떠나기 시작하고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식구가 허룩하게 줄고 슬하가 적막하게 되었다. 자식이 제때제때 짝을 만나 부모 곁을 떠나는 것도 큰 복이라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식구가 드는 건 몰라도 나는 건 안다고, 문득문득 허전하고 저녁 밥상머리에서 꼭 누가 더 들어올 사람이 있는 것처럼 멍하니 기다리기도 한다. 딸애들이 한창 혼기에 있을 땐 어떤 사위를 얻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모여도 화제는 주로 시집보낼 걱정이었다. 큰 욕심은 처음부터 안 부렸다. 보통 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쉬워 보통 사람이지 보통.. 2022. 12. 18.
자연을 독하다 자연을 독讀하다 / 박양근 이곳에서는 철따라 다른 맛이 풍겨난다. 이른 봄에는 파릇한 쑥밭이 깔리는가 하면, 식욕을 잃은 늦봄에는 생강나무 꽃 냄새가 풍겨오기도 한다. 여름이 되면 잘 익은 도화가 혼을 빼놓고 가을바람이 차다 싶으면, 중앙절 국화 향기가 다시 그리워진다. 때맞추어 바뀌는 풍경에 넋 놓고 있노라면, 낙엽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가는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늘 같지 않다. 움직이고 흔들린다. 계절의 순환도 마찬가지다. 봄이 소생의 시절이라면 여름은 성숙의 절정기이고 가을이 풍요의 시기라면 겨울은 인고의 고비에 해당한다. 사람에 비하면 생로병사이고, 나라에 비하면 흥망성쇠이고, 우주에 대비하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다. 사계가 그러할 진데 계절에 얹혀사는 만물이 어찌 변하지 않을 것인가? 요즘 나.. 2022.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