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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신춘문예 작품(소설, 수필, 시 등)15

수박 ‘수박’/ 하가람(세계일보) 여름은 해가 길었고 우리는 시원한 곳을 찾아다녔다. 도시의 많은 이가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꽃집을 겸하는 카페와 일본식 정원을 가진 대형 카페는 만석이어서 우리는 빈자리를 찾아 더운 거리 구석구석을 헤맸다. 거리에 그토록 카페가 많은데 모두 사람이 차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다섯 번째로 방문한 카페도 마찬가지로 실내에 앉을 곳이 없었는데 테라스 자리만 텅 비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우리는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직원이 아이스커피와 주스를 내올 때까지 우리는 노란 차양 아래 앉아 날씨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덥다, 어제는 그제보다 더웠는데, 내일은 오늘보다 더울지도… 그건 우리가 사흘 전에도 일주일 전에도 나눈 비슷한 이야기,.. 2023. 1. 4.
녹 /공현진(동아일보) 《녹은 내가 강의하던 학교들로 찾아와 시위 비슷한 걸 했다. 이상한 문장을 쓴 종이를 들고.》 곤란하게 됐어. 주임 교수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그녀가 아직 하지도 않은 말을 떠올렸다. 전화를 끊을 때까지 머릿속에 배경음처럼 같은 말이 울렸다. 해촉 통보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잘못도 아니었다. 강의를 나가고 있던 다른 두 개의 대학에서 잘린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인 모교의 주임 교수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고 용건은 뻔했다. 모두 같은 말을 했다. 노 선생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학교가 시끄러우니 어쩔 수가 없다. 곤란하게 됐다. 누가 곤란하게 됐다는 것일까. 주어가 없는 말들은 참 편리했다. 그런 말들은 미안하지 않으면서도 미안한.. 2023. 1. 4.
쥐 / 전지영(조선일보 2023신춘문예 단편소설) J시 해군 관사 단지는 21층짜리 아파트 총 열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중앙에 서 있는 영관급 관사 101동을 위관급 관사 열 동이 감싸 안은 모양으로, 학익진을 연상케 했다. 영관급 관사 거실에서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지만, 위관급 관사에서는 영관급 관사의 뒤통수에 가려 3분의 2쯤 조각난 바다만 보였다. 거기다 위관급 관사는 뒤편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일 년 중 절반은 날 선 산바람이 불어들었다. 영관급 관사로 불어오는 바람을 위관급 관사가 온몸으로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구월 초가 되면 관사 근처 다이소에는 뽁뽁이와 문틈 막이 테이프가 동이 났다. 뽁뽁이를 구하지 못하면 비닐이라도 구해서 붙여야 겨울을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윤진의 남편은 아이.. 2023.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