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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신춘문예 작품(소설, 수필, 시 등)15

종을 사랑하는 법(수필) 종(種)을 사랑하는 법 / 강동우 - 2023 매일신춘문예 당선작 늙은 강아지가 좋다. 눈물이 그린 세월의 흔적, 윤기 없는 털이 서로를 꼭 붙든 모습,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회색 눈동자, 이 모든 것이 좋다. 인생의 고난을 반려견 똘똘이의 황혼기와 함께했기 때문일까. 길을 걷다 보면 피부가 마모된 개들에게 유독 시선을 빼앗긴다. 첫 직장이라는 절벽에서 호기롭게 뛰어내린 젊은 독수리는 날개가 부러져 추락하고 말았다. 날개 꺾인 독수리를 가장 오랜 시간 지켜본 건 황토색 새치 가득한 요크셔테리어였다. 일원도 못 버는 백수가 똘똘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전거 앞에 바구니 하나 매다는 것뿐이었다. 다리가 닳고 닳아 걷지 못했던 작은 강아지는 바깥바람을 좋아했다. 앉는 것조차 힘든 늙은 아이를 위해 바.. 2023. 1. 4.
숨비들다 숨비들다/ 고은경(경인일보 신춘문예) 소라들이 알을 낳는 동안에도 엄마는 쉬지 않았다. 6월에서 8월은 소라 산란기이자 해녀들의 금채기였다. 한쪽의 숨이 트이기 위해 다른 한쪽은 숨을 돌려야 했다.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지면 엄마는 밭일에 매달렸다. 다시 물질하러 다닐 때 먹기 좋을 소라젓과 마늘지도 담갔다. 때로는 서해 쪽으로 해삼 채취에 나섰다. 어떻게든 물질을 이어가야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기에 부득부득 자리를 얻고자 했지만 실력 좋은 상군 삼촌들에게 밀릴 때가 많았다. 소싯적엔 상군 중의 상군이었다는 엄마가 수심 10미터의 중군 영역으로 밀려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눈썰미 좋고 손이 빨라 상군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리곤 했으나 깊은 바다에 부려온 기억들을 떨쳐내진 못하는 듯했다. 엄마는 방학을 .. 2023. 1. 4.
보스를 아십니까 보스를 아십니까/ 김만성(전남매일신문) 후계자 면접을 보러왔다는 젊은이가 구두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추위 때문인지 젊은이의 뺨이 유난히 붉었다. 나는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고는 찬찬히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젊은이가 다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면접 전에 자네 구두를 닦아주려는데 괜찮겠나?” 비즈니스 정장을 입은 젊은이는 쭈뼛거리다가 구두를 벗어 건네주었다. 버클로 포인트를 준 슬립온 스타일이었다. 끈이 있는 옥스퍼드에 비해 캐주얼 하지만 정장에도 어울리는 구두였다. 대개 손님들의 구두에서는 쿰쿰한 발냄새가 나는데 그의 구두에서는 아로마 향이 풍겼다. 이질적인 향 때문인지 재채기가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구두를 뒤집어보니 굽 좌우가 비슷하게 닳아있다. 반듯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구나 싶었.. 2023. 1. 4.
낮에 접는 별 낮에 접는 별/양수빈(문화일보) 홍주가 가야 할 강의실은 3층 301호실이었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 멈춰 서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엘리베이터는 내려오지 않았다. 버튼을 두세 번 더 누르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주는 팔뚝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가팔랐고, 한 명이 겨우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홍주는 누군가 위에서 내려오는 상상을 했다. 그럼 누가 물러나야 할까. 아무래도 뒤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 양보해야겠지. ​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던 홍주가 코트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홍주는 손안에 만져지는 차갑고 날카롭고 예리한 물체의 윤곽을 더듬었다. 홍주의 엄지가 날 끝을 꾸욱 눌렀다가 날 선을 타고 미끄럽게 내려왔다... 2023.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