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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신춘문예 작품(소설, 수필, 시 등)15

휠얼라이어먼트 휠얼라이어먼트/신보라(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나는 강을 본다.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이었다. 물의 경계가 확연했다. 두 강의 물빛이 달랐다. 재이는 물의 밀도가 달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곳은 오래 공사를 했다. 산책로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산책로를 따라 돌았다. 저녁에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한 사람처럼 한 방향으로만 걸었다. 돗자리를 펴놓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재이도 산책로를 따라 돌았다. 어떤 날에는 물도 멈춘 것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마다 그랬다. 재이는 뛰지 않았다. 재이야. 뛰어. 내가 말했다. 싫어. 재이가 말했다. 왜? 숨 차. 난 그 기분이 너무 싫어. 재이는 중등부 육상선수였다. 재이는 그때 다 뛰어버려서 이제 더 이상 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재이는 .. 2023. 1. 4.
피비 피비 /이혜정(경상일보) 벌써 여름이 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전인데도 볕이 뜨거웠다. 나는 카페에 앉아서 유리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잎사귀와 들풀, 햇빛이 한데 어룽지며 뒤섞였다. 때 이른 열기와 오월의 서늘한 바람이 어우러져 흔들렸다. 그곳은 초록으로 소용돌이치는 출구 같았다. 움직이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고여 있는 건 질색이었다. 흔들리고, 멈추고, 흔들리고, 멈추고. 언제까지나 그걸 바라볼 수 있겠다 싶었다. 아이스 카페라떼는 이미 다 마시고 호두와플도 남김없이 먹어버렸지만 그렇게 한참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카페가 위치한 곳은 탄동천 옆 지질연구소 건물 1층이었다. 건물 바로 앞으로 좁은 산책로가 나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물이 흘러가는 건 보이지 않았다. .. 2023. 1. 4.
체조합시다 체조합시다/ 김사사(서울신문) 이것은 아시아나 스포츠 상설 매장에서 산 트램펄린. 공중부양. 수양은 뛰고 있다. 흔들리고 있다. 조금씩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다. 전시제품이므로 모서리 변색 있음. 그러나 탄력 좋음. 아시아나 아저씨는 이것이 아주 튼튼한 물건이라고 말했고 정말 그렇게 생겼으니 괜찮겠다 싶지만 수양은 어쩔 수 없이 좀 무서워진다. 그녀는 변색한 트램펄린 모서리를 손톱으로 살살 긁으면서 물었다. 아저씨. 만약 부러지면 어떻게 할 건지?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요 아가씨…. 맞는 말이다. 수양은 칼을 팔러 가기 전에 튼튼하고 단단한 물건들을 생각하며 오십 분씩 뛰었다. 붉은 벽돌과 철제 의자 강화유리로 된 창문 그리고 칼…. 트램펄린 앞에는 높이 백칠십 센티미터짜리 거울이.. 2023. 1. 4.
몇 초의 포옹(수필) 몇 초의 포옹 / 조남숙(경남신문 신춘문예) ‘폐허는 사람이 없어야 폐허가 된다. 역사의 한 부분을 떠들썩하게 채워 넣던 도읍지였을망정 인걸이 간데없어지면 폐허가 된다’(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 서현 지음 / 효형출판, 2014)는 문장에서 폐허를 생각한다. 사람은 공간에 에너지를 채워 넣는 중요한 유기체다. 유기체는 공간에 모여 구분 불가능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공간 속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사람의 힘은 달콤하면서 힘이 있다. 사람 구경 할 수 있는 시장이나 백화점, 극장이나 공연장, 그 어떤 장소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은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다. 그중에서 움직임이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곳이 계단이다. 나에게 세종문화회관은 정신세계의 중심이었다. 화재로 소실된 시민회관의 명맥을 .. 2023.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