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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

77. 전황당인보기

by 자한형 2022.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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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당인보기(田黃堂印譜記) -정한숙

 

1.

 

석운(石雲) 이경수(李慶秀)가 선비로서 야인(野人) 시절이랄 것 같으면 문방사우(文房四友)중 무엇이든 들고 가서, 매화옥(梅花屋) 뜰 한가운데 국화주(菊花酒) 부일배로 한담소일하면 옛 정리 그에 더할 것 없으련만, 석운이 벼슬을 했으니 지() () ()을 즐길 여가가 있을 것 같질 않았다.

정표(情表)라기보다도 수하인(受荷人) 강명진(姜明振)은 벼슬한 친구에게 기념이 될 만한 것을 꼭 선사하고 싶었다.

애당초 시속적인 물건은 고를 생각도 없었고, 그것은 석운의 구미에도 맞을 것 같질 않았다. 석운에겐 물론, 자기 자신의 성미에까지 들어맞는 것을 골라내자니 매우 힘들었다.

()이라면 집에 있는 단계연(端溪硯)이 알맞겠지만, 그것만은 수하인으로서도 내놓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물건이다.

일전 골동품상에서 구한 속칭 운근(雲根)이라고 하는 분석(盆石) 생각도 해보았다. 아아(峨峨, 산이나 큰바위가 아슬아슬하게 솟아있는 모양)한 봉우리라든지…… 감쳐 흐르는 계곡이라든지, 보면 볼수록 그윽한 대자연 속에 묻혀 있는 듯싶은 감이 절로 흐르는 분석 역시 선비의 취미지, ()에 나선 석운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취(雅趣)도 있도 그 반면 실용성이 있는 것이라면 인장(印章) 한방(壹方)이 고작인 듯했다. 화유석(花乳石, 누른 빛깔의 바탕에 아롱진 흰 바탕의 점이 박힌 돌) 중 그래도 골라 잡으려면 등광석(燈光石)이 엄지손가락에 오르겠지만, 그것은 문헌에나 있는 돌이요, 수산의 동석(凍石, 몸이 썩 고운 활석의 한 가지), 동석 중에서도 어뇌동(魚腦凍) 같은 것을 구하여 한인(漢印)의 풍모를 따서 한방 새겨 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석재란 쉬운 일이 아니다.

흔한 것이 해남의 화반석(花斑石, 바탕이 곱고 무른 돌)과 오석(烏石, 바탕이 검은 파리 광택의 무른 돌)같은 것이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고, 계혈석(鷄血石) 같은 것은 구할 순 있어도 수하인은 길사(吉事)에 그 붉은 것을 꺼리었다.

어느 날 오후다. 동대문 시장 뒷골목에서 서울운동장 쪽으로 빠져 나오려면, 사주관상쟁이들이 늘어앉아 있는 틈에 끼여 진종일 먼지만 날리는 잡상들이 있다. 잡상들이 벌여놓은 쇠붙이 속에 우연히도 수하인은 한방의 석재를 발견했다. 벌써 십오륙년 전 일이다.

서화를 즐기던 거부(巨富) 이 모()가 원정(園丁) 민영익의 인장 한방을 구했다 하여 보여주던 기억이 새로웠다. 세 개의 돌을 움켜쥔 수하인은 말할 수 없는 흥분이 손 끝에 떠오름을 참을 수 없다. 딴 것은 몰라도 인수(印首)의 특징이 아직도 그 기억을 잃지 않게 했다. 아편을 빨던 이모, 그후 가산을 탕진했고, 지금은 그 행방조차 묘연하나 인장에 관한 것을 알 바가 더욱 없었지만, 그후 누구의 손을 거쳐 나왔는지 인연이 말짱스레 갈려 있었다. 돌의 가치를 알아서 부르는 값은 물론 아니겠지만, 한 개에 이백환 꼴로 육백환만 내라는 것을 달라는 대로 치러준 수하인은, 도야지 품에서 진주를 구한 것같이 기뻤다.

전황(田黃), 전청(田靑), 전백(田白), 물론 그것이 다 동석에 소속하는 돌 종류이지만, 밀화(蜜花)같은 전황석은 화중(花中之花). 아늑한 빛깔과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전황석의 값을 옳게 따지면 금값의 열 배가 보통이지만, 수하인은 그것을 헐값으로 샀다는 것보다, 내력으로 보아 석운에게 줄 만한 물건을 구한 기쁨이 더 컸다.

포자(布字)에 한나절이나 걸린 셈이다. 포자가 되었으니 칼로 오리면 그만이다.

"그 청승맞은 일을 또 하시는구려......"

수하인은 그냥 빙긋이 웃었다.

오십 평생의 절반을 산홍(山紅)이와 같이 늙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돌을 주무르며 지낸 폭이다. 부모가 맺어준 누님 같은 마누라에게 정을 두지 못한 수하인은, 여자에게 눈이 틔면서부터 기생집 출입이 잦았다. 말하자면 산홍의 첫머리를 수하인이 얹어 주었다.

그 후 삼십 여 년간 수하인은 명문이란 가문의 존엄성이 두려워 산홍이를 집에 들이지 못한 채 떨어져 정을 나누었다. 부산 피난살이에 누님같이 어렵고 때로는 종같이 천하기만 하던 마누라가 세상을 떠났으니, 수하인은 아들 며느리와 같이 있을 재미도 없었다.

그가 누구보다도 먼저 환도한 것은 이런 사정도 있었지만, 산홍의 자취를 수탐해 보려는 은 근한 생각이 더 앞섰던 까닭이다.

서울로 오자 수하인은 광 속부터 열어 보았다. 쓸 만한 가재는 다 들어냈어도 한평생 같이 살아온 천여 개의 석재 인장이 고대로 보존된 것이 고마웠다. 그것이 있음으로, 한편 반가우면서도 개개의 인면에 서려 있는 듯 귓속에 암암해지는 산홍의 입김이 옆에 들리지 않는 것이 사무치게 서운했다.

그해 겨울 수하인은 학()같이 말라들었고 꺼칠하게 늙었다.

곰팡이가 슨 함들을 다시 뜯어 바르며, 그 하나 하나를 닦고 문지르는 것이 그해 겨울의 일과였다.

주인 없는 서울 거리의 가로수에 새 움이 트기 시작하던 어느 날이다. 청계천변에서 우연히도 산홍이를 만났다. 소녀같이 부끄러워하며 눈물이 핑 고인 산홍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수하인도 언짢았다. 그날부터 수하인은 경운동 산홍이 집으로 옮겨 살았다. 산홍은 가끔 수하인의 그런 취미를 청승맞다고 했다. 그렇다고 산홍이도 서화의 즐거움을 까맣게 모르고 살진 않았다. 시속(時俗)에 어울리지 않는, 더욱 돈과는 인연 없는 일이라고, 생활에 졸릴 때마다 하는 말이다.

칼을 든 수하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인면(印面)을 내려다보았다. 전기 사정이 나빠 등불을 켜고 심지를 돋군 탓인지 기름 냄새가 몹시 사나웠다.

 

석운 이경수지인(石雲 李慶秀之印)....

 

다음은 인수를 새길 차례다.

산홍이가 옆에서 달여 놓은 차를 한잔 마시고 난 수하인은 눈을 지긋이 내리 감았다. 인수에다 무엇을 새길까를 생각하는 중이다. 산홍이와 자기의 정성을 합쳐 석운에게 주려는 선사품이다.

산수(山水)...

눈을 가늘게 뜬 수하인은 기쁨이 만면에 돌았다. 포자를 일부러 쓸 필요도 없었다. 인수는 멋이요 흥이면 그만이다. 칼을 쥔 수하인은 멋과 흥에 무도법(舞刀法)으로 인수를 팠다. 황소송(黃小松)의 무도법이랄까, 수하인은 절로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삼십 년 전 산홍의 젊은 입김이 귓가에 아물거리는 것 같았고, 칼을 쥔 자기 손끝에도 옛 시절의 피가 다시금 흐르는 것 같았다.

 

石雲 李慶秀之印 山水

 

흰 백지에다 나란히 내려찍어 놓고 보는 수하인의 콧등엔 땀방울까지 올랐다. 산홍이가 풀칠한 양단 헝겊으로 갑을 만들어, 인장 한방을 간직해 놓은 수하인의 가슴속엔, 새로운 싹이 돋아 오르는 것 같았다. 등불 밑에 허연 산홍의 입김이 오늘밤 따라 더 다정했다.

 

2.

 

매화옥을 찾아가니 석운은 그곳에서 이사를 해버린 뒤다. 이사한 것까지 모르고 있었으니 다정턴 친구 사이가 퍽 소원해진 것 같아 서운했다 남산동 새로 이사간 집을 찾아갔을 땐 날이 퍽 어두운 때였다. 꼭 석운을 만날 생각으로 일요일을 선택했었지만, 파수 보는 경관의 말에 의하면 석운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모님이라도 만나 뵙겠다고 사정을 해서, 현관을 통해서 응접실로 들어갔을 땐 전등까지 들어온 후다. 석운의 끝놈이 동소문 아저씨가 왔다고 한참 떠들어대도 안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벌써 반년 가량은 석운을 찾지 못했는데도 여섯 살짜리 끝놈이 용케 알아보는 덴 수하인도 은근히 기뻤다.

"아버지 매일 바쁘시냐?"

", 나 잘 때야 들어와."

어린 소견에도 수하인을 응접실에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민망스러웠던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동소문 아저씨가 왔다고 고함을 질렀다. 끝놈의 손에 끌려 석운의 마누라가 나왔다.

"안녕하셨지요?"

"어쩐 일이십니까?"

"글세, 한번 온다온다 하면서도 어디 그렇게 됩니까...."

"그러지 않아도 늘 말씀하시던걸요......이러다간 친구들까지도 잃어버리게 될 것 같으시다구......"

"만나야 친구겠습니까......"

"친구들의 부탁을 듣고도 해드리지 못해서 하는 말씀이지죠......"

"부탁하는 친구가 그르지,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나쁘겠소."

석운의 아내는 남편이 들어 골치 아픈 부탁이라도 하러 온 것이 아닌가 하여 넘겨짚고 하는 말이지만, 수하인의 표정엔 그런 눈치가 뵈질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시겠지요?"

"보나마나 자정이 돼서야 돌아오실걸요."

그 대답엔 석운의 아내도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주고 받을 생각도 간절했지만 기다려야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벌써 온다면서도 이렇게 늦어지고 보니 석운을 뵈올 면목이 없소이다."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디 그런 짬이 있을라구요....."

", 석운에 대한 정표니, 웃고 받으시라구 전해주시우."

"서로 이럴 새가 아니실 텐데 무슨 말씀이 없으실까요?"

"무슨 말씀이 있겠어요. 친구가 선사하는 것인데...... 별게 아닙니다."

별것이 아니라면서도 얌전하게 싼 것이 석운의 아내 마음을 끌었다.

 

무엇이냐고 덤벼드는 큰 것과 작은 것들을 물리치고 잠자리에 누워 풀어본 석운의 아내는 기대했던 바와는 딴판인 물건에 크게 놀랐다. 쓸모 없는 돌조각이 들어 있었고, 또 가지런히 찍어 놓은 도장은 부적(符籍)인 듯싶어 불길한 생각이 돌았다. 아무리 흉허물없는 친구 사이라 해도 이런 물건을 선사한다는 것이 석운의 아내에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이 벼슬한 후로는 외박이 잦아,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지만, 더욱 그런 생각과 겹쳐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남편의 외박이 잦아도 생활이 풀린 것과, 또 듬썩듬썩 들어오는 금붙이와 그 비슷한 것을 받아 축적하는 재미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생각을 누르고 살 수 있는 석운의 아내였다.

요즈음 벼슬이래야 언제 어떻게 또 물러서게 될지 모르는 판이고 보니, 남편이 나 다니는 동안에 넉넉히 벌어두어야 하겠다는 그것만이 부덕(婦德)이요 남편에 대한 아내로서의 자랑이었다. 선비 자랑하고 궁하게 살던 석운의 아내였기에, 그런 일에 대해선 더욱 심한 편이기도 했다.

"어제 동소문 강선생이 왔다 가셨지요."

", 그 친구 오래간만인걸......"

"그이도 사변(事變)통에 정신이 좀 돌았는가봅디다."

"처음부터 격이 좀 다른 사람이지......"

"! 무슨 일이 있었어?"

"별사람 다 보았지요."

"무슨?"

석운의 말끝엔 자기도 의식 못하는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이게 뭐겠수? 돌 조각에다 도장을 파 갖고 벼슬한 기념으로 선사를 한다니......"

아내의 표정을 석운은 모르는 배 아니지만, 석운 눈에도 물건이 들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석운은 수하인다운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인장 한방을 받아들고 나왔다.

오전 중은 인사로 바빴고, 오후는 방문객으로 분주하며, 밤은 밤대로 사교와 술대접으로 전용차를 달려야 했다. 그것이 벼슬한 석운의 생활 전부였다.

 

오준(吳俊)은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 한번 석운을 찾는 것이 일과였다. 그는 석운의 방을 무상 출입하는 특이한 존재다. 물론 석운과의 교분도 두터웠지만, 석운은 요즈음 오준이 가장 미더운 친구였다. 여러 가지 일을 꾸며 갖고 오는 그 솜씨도 솜씨였지만, 석운 자신 그리 힘들여 하는 일도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석운의 안팎 살림을 돌봐주는 그 의리가 오준을 미덥게 했다.

"어떻게 오늘은 늦었수?"

"별일 없이 늦었구먼요. 어제 그 일로 찾아왔던 친구가 새벽부터 달려들어 성사시키도록 하라고 졸라대는 통에 진땀이 났습니다. 가망성이 있을까요?"

"오형 짐작대로 생각하면 되지 않수......., 이걸 좀 봐요."

"이게 무슨 돌이지요?"

"글세 무슨 돌이던 간에 돌이야 돌이겠지, 금이 될 수 있겠소. 값이라면 새긴 정성이겠지요....."

"돌이나 좋은 것이면 몰라도 도장이야 어디 쓸모가 있어요?"

"왜요?"

"이거라구야 석운선생 퇴관 후에나 쓸모가 있을지, 지금 당장에야 어디다 이걸 씁니까?"

"그것도 옳은 말씀이시구만, 어제 수하인 강명진형이 한 벌 해온 것이랍니다."

오준도 수하인과 교분은 그리 두텁진 않아도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천지가 변했어도 수하인은 변한 것이 없구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석운과 오준은 도장을 가운데 놓고 서로 빙긋이 마주 웃었다. 결재를 받으러 비서가 두세 번 드나든 다음 방안은 또 조용했다. 기름 난로의 불길이 과한지 등에 땀이 흐를 정도다.

"지금 보니 석운 결재 도장이 틀렸구만요. 이왕이면 생각났을 때 하나 새겨두도록 합시다."

"그런 생각도 없진 않지만......"

"결재 도장이야 좀 위엄이 있어야지, 도장부터 눌려서야 됩니까?"

그런 생각도 간절했지만 석운은 눈치가 보일까 잠자코 있었다.

"이것은 갈아 제 것이나 파구, 석운은 좀 잘생긴 것을 골라 만듭시다. 만환 정도나 주면 제법 쓸 만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오준은 가타부타 석운의 결정도 없이 전황석 도장 한방을 자기가 간직해 버렸다. 석운은 좀 섭섭했지만 요즈음 의리로선 오준이 집어넣은 것을 도로 내놓으라고는 할 순 없었다.

"수하인, 격은 멋든 사람이지만 궁티가 벗질 못한 사람이거든......."

"암 더 말하면 입이나 아프지요."

오준이가 맞장구를 쳐주는 통에 석운은 수하인에 대한 미안스럽던 생각도 풀리는 것 같았다. 석운의 귀에다 입을 대고 무슨 말인지 한참 숙덕거리고 난 오준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싱긋 웃었다.

"글세 별로 염려할 건 없을걸요. 그 문젠......"

오준의 벌린 세 손가락에 절로 힘이 나는 듯 석운은 자신 있게 장담을 했다. 오준이 나간 다음에, 석운은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매화옥에서 나온 지 불과 반년이건만 아련한 옛일 같았다. 수하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긴 했다.

서화에 눈을 뜬 것도 말하자면 서당개 삼 년에 음풍월한다는 격으로 수하인의 영향이 컸다. 매화옥 이십 년의 생활을 돌이켜 생각하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고생살이였다. 수하인과 벗하게 된 것도 말하자면 일제 때엔 환경이 주는 불만에서 접근했고, 해방 후 벼슬에 오르기 전까지는 혼란과 울분 속에서 자주 일어나는 불평을 수하인의 격 다른 품속에 삶으로 참아낼 수 있었기에 가깝게 지낸 사이다.

길이 달라진 오늘, 스스로 수하인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이질적인 존재요, 또한 당금에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인물 같기만 했다. 지금 석운으로선 도저히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면 안될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수하인에 대해서 야릇한 동정이나마 금할 순 없었다.

 

3.

 

"글쎄올시다."

도장방 주인은 인면을 들여다보며 오준의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값이 나가는 것이요?"

"누가 새긴 것입니까?"

"수하인이란 사람이 새겼다나 봅니다......"

주인도 그것이 수하인의 솜씨임을 모르고 물은 말은 아니다. 무슨 까닭에 이 도장이 한길에 나오게 되었는질 알고 싶어 묻는 말이다.

"수하인 같은 분이 새겼다면 값을 말하기가 힘들지요."

"건 무슨 말씀이요?"

"우리 영업하는 사람이야 석재와 치수에 따라 값을 정하지만, 수하인 같은 분이야 원래 장사가 아니시니까 헐값에 그냥도 줄 수 있는 반면, 부르는 것이 값이 되는 경우도 있지요."

"글세, 선살 하려면 좋은 석재를 써서 하지 영 어울려야죠...... 그 좋은 재료를 좀 구경합시다."

주인도 그 재료가 무슨 재료인지는 감별할 능력이 없었다. 밀화 같이 말끔한 돌이라는 것으로, 혹시나 수하인이 늘 말하던 전황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손님에게 설명할 필욘 없었다.

주인이 먼지를 훅 불어 내놓는 곽 속엔 각종 석재가 그득히 들어 있었다.

"골라 보시우."

이렇게 뒤섞어져 있는 데선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

"이게 어떻습니까?"

"그야 손님 의향이지죠."

"대리석이죠?"

"대리석에다 대겠습니까? 계혈석(鷄血石,석회암 가운데 주홍빛 무늬를 이룬 돌)이란 특수한 돌입니다."

"결재 도장이니까 무늬도 좀 이렇게 울깃 불깃한 것이 위엄이 있어 뵈지 않습니까?"

"그야 쓰시는 분 마음이지만......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것 같기두 합니다."

장사치란 손님의 비위에 오르내리는 존재들이지만 오준은 저으기 만족했다. 자체(字體)를 고르고 값을 흥정했다. 어차피 새겨갈 도장이란 것을 눈치 챈 주인은 값을 듬뿍이 불렀다.

"한 자에 삼천 환씩 치고, 재료값까지 합쳐 만오천 환이면 비싼 값이 아닙니다. 그러구 이런 어른의 도장을 새기면 널리 선전도 되고 해서 처음부터 싼값으로 부른 것입니다."

석운 앞에서 오준이 만환 정도면 될 것이라고 장담한 것은 값을 알고 한 말이 아니라, 엄청나게 불러본 것이지만, 실지 그 이상이고 보니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비싼 값이 아닙니다. 서울 장안 다 돌아다니셔도 더 싼 값을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결을 보십시오. 품이 곱이나 더 듭니다. 수정과 상아 말씀을 하시지만 그런 것이라면 제가 이 재료를 사는 셈치고 그냥 새겨드리지요."

오준은 그 말엔 귀가 솔깃했다. 이 하치 않은 돌 대신 수정이나 상아 도장을 그냥 새겨 준다니 흥정은 된 흥정인 것 같았다.

"그러실 것 없이, 이 재료를 맡으시고 상아 도장 하나 더 끼워 만환 하나로 합시다."

주인은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였다.

좀 싼 값이긴 해도 그 도장을 수하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까닭이다. 서법(書法)과 도법(刀法)은 물론, 돌을 다루는 것까지 이 주인은 수하인에게 배우다시피 한 사람이다. 주인은 수하인을 찾을 생각으로 일찌감치 가게문을 닫았다. 동소문 집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좁은 방이지만 알뜰스레 꾸며 놓은 건넌방에 수하인은 등불 밑에 단좌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 웬일인고? 가게를 일찍 닫았구만....."

"...... 오늘 좀 이상스러운 물건이 들어왔기에 일찍 문을 닫고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젊은 친구가 내놓는 도장갑을 보고 수하인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연고인고?"

젊은 친구는 오준이라는 작자가 그 도장을 갖고 와서 결재 도장으로선 어울리진 않는다고 하던 말에서부터 낱낱이 일러 바쳤다.

"자네 복일세......술을 좀 하던가?"

조용히 묻고 난 수하인은 술상을 청했다. 술을 들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 마음의 동요를 누르려고 애쓰는 것 같이 보여, 젊은 주인은 오히려 미안스러웠다.

"그것이 전황석일세, 자네 처음이지?"

"?"

젊은 주인은 전황석이라는 말에 주기가 훅 위로 오르는 것 같았다.

"원정 민영익씨가 쓰던 인장이지......그것이 어쩌다 거부 이모()가 갖고 있던 것을 우연스레 구했기에, 석운이 벼슬을 했어도 선사할 것이 있어야지. 그래 보냈더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무양이구만. 자네 손에 갔으니 이제야 제값을 불러줄 사람을 찾은 셈일세."

수하인이 갖고 가라곤 하지만 젊은 주인은 들고나올 수가 없었다. 자기 솜씨라면 뻑뻑 갈아버릴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 재료가 귀중한 것이라 해도 마음대로 갈아버릴 수 없는 물건인즉, 들고나올 필요가 없었다.

"전황석을 알고 쓸 사람이 몇 사람 있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선생님이 보존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하인은 몇 번 사양했지만 젊은 친구의 고집도 어지간했다. 계혈석 도장을 새겨주기로 하고 수하인은 그것을 받아두었다. 버릴 수 없는 친구에게 버림을 받은 듯싶어 한없이 섭섭했다.

"산홍이, 술을 한잔 따라주우."

산홍은 수하인 하라는 대로 술을 따라 권했다. 밖엔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잔을 산홍에게 권했다. 산홍은 옛날과 다름없이 두 손으로 받은 잔을 호반 위에 놓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산홍이었지만, 오십을 바라보는 얼굴이면서도 잔주름이 없었다. 수하인은 가라앉은 마음의 흥을 돋구려고 대금(大琴)을 들었다. 귀에 익은 가락이다. 한잔 술에 얼굴이 붉어진 산홍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지나온 한평생이 대금의 가락 모양 산홍에겐 쓸쓸하고 외로웠다. 가락을 짚는 수하인의 손끝은 허무한 인정에 떨었고, 지그시 감은 긴 살 눈썹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4.

 

이튿날도 함박눈이 연달아 퍼부었다. 수하인은 약속대로 계혈석을 다듬어 포자를 써보았다. 마음에 들질 않았다. ()은 어찌 되었든 간에 글자와 글자 사이에 생겨나는 공백을 메울 수가 없었다. 위로 획을 올리면 밑으로 구멍이 생기고, 밑으로 내리면 위로 여백이 남았다. 벌써 몇 차례 다시 고쳐썼지만, 처음이나 나중이나 같은 판이다. 전황석을 새기던 때의 솜씨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손이 하룻밤 사이에 떨어졌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선 수하인은 운현궁 앞을 지나 탑골공원 뒤로 해서 종로로 나섰다. 도장포 젊은 주인을 찾아가는 길이다. 눈은 한길 위에 겹겹이 쌓이지만 가슴속은 구멍이 뚫린 것같이 허전스러워지기만 했다. 무슨 생각에 잠겼던지 도장포를 지났다가 다시 되돌아와서야 가게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 숫눈길에 선생님두......"

", 그 일로 나왔지.......글씨가 돼야지."

가게가 좁은 탓인지 구공탄 난로가 제법 뜨스하다.

"어젠 너무 과음한 탓인지 손이 떨려 포자가 안 되어......"

"그냥 두어두세요. 제가 그런대로 샛길 테니......"

술을 과음했다고 손이 떨려 포자를 쓰지 못할 수하인이 아니다. 젊은 주인은 그냥 버려두라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이왕 약속한 것이니 포자만 쓰라기에 끝끝내 거역하질 못했다.

"이만하면 그 친구 마음에도 들 걸세."

젊은 친구는 인면을 들여다보았다. 지도법(遲刀法)을 썼지만 수하인의 솜씨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젊은 주인은 이러니저러니 해서 그를 더 괴롭히고 싶질 않았다.

"인젠, 칼 재미도 점점 식어가......"

혼자 중얼거리는 수하인은 함박눈이 꼬리치는 창 밖만 내다보고 앉아 있다. 술이라도 권할 생각으로 몇 번 붙잡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눈은 퍼부어도 날씨가 누긋한 편이다.

숫눈길을 걷는 수하인은 칼을 버릴 결심을 비로소 내렸다. 그러려면 지나온 자기 발자취를 한데 묶어놓고 싶었다. 참지(창호지) 한 권을 사들고 온 수하인은 우선 아랫목으로 앉아 몸부터 녹였다. 따스한 기운이 등골에 올라, 전신은 노긋해지지만, 두껍게 접혀진 마음의 주름살은 펴지질 않았다.

전황석 인장 한방을 꺼내어 다시 본다. 돌에 묻어 있는 손때의 아운(雅韻)과 그 고졸(古拙, 서툴러 보이지만 고아한 품격이 있음)한 품에, 수하인의 손끝은 새로운 흥분이 흘렀다. 참지를 접어 한 권의 책을 맨 수하인은 간격을 잡아가며 천을 헤아리는 인장을 기억에 떠오르는 대로 비교적 연대순을 따져 적었다. 물론 전황석 한방도 맨 나중에다 찍어 놓았다. 밤도 저으기 깊었다.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방안은 조용하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청아(淸雅)한 선이 경()한 것 같았고, 때로는 둔한 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끝으로 전황석 한방만은 수하인으로서도 나무랄 점이 없었다. ()하고 담()한 것이 산홍의 숨길이라면, 뭉친 획은 수하인의 절정에 이른 품()이요 지()였다.

산홍이를 옆에 앉히고 그와 더불어 살아온 일생을 그린 인보(印譜, 온갖 도장을 찍은 글자를 모아 둔 책)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처음 자기가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

산홍이가 연적의 물을 따라 먹을 갈고, 수하인이 황모필 가는 붓으로 전황당인보기라 표지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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