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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베트남 다낭 여행기

by 자한형 2021.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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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07:00 인천공항 출발, 베트남항공 10:50분 다낭공항 도착 가족 12(5. 7, 어른9 아이3) 동반 여행3(안성) 중식 (월남쌈, 쌀국수) 석식(한식 쌈밥) 경응사 - 대성당 -카오다이교 사원 - 불꽃놀이]

 

베트남 여행 출발일이다. 새벽3시에 알람에 맞춰 일어나 준비를 해서 30분후에 벅스택시에 탔다. 미리 예약해 놓은 공항 전용택시였다. 다른 승객은 없었다. 곧바로 여의도로 갔다. 그리고 88도로를 타고 인천공항을 향해 내달렸다. 430분까지 여행사 부스에 들러야 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에 다른 가족들은 이미 도착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광주에서는 밤11시에 출발을 했고 대전과 세종은 권서방이 직접 운전해 왔다. 광주 가족이 5명이었고 대전이 5명이었다. 광주는 조카인 기영이가 차로 데려다 주었다. 가족과 반갑게 조우해서 출국수속을 밟으러 갔다. 당초 예약에 없다가 추가로 들어간 내가 문제의 불씨를 만들었다. 예약번호에 착오가 있어 다소 지체가 되었다. 기영이가 곧바로 확인을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항공권의 발권을 받았고 케리어 짐 등 무거운 것을 일차로 보냈다. 다음은 통관절차였다. 무난하게 공항 관문을 통과해서 게이트 부근으로 갔다. 그리고 아침식사로 던컨 도너츠와 커피 음료 등을 사서 먹었다. 항공기 이륙시간에 맞춰 게이트로 갔다. 저가항공이어서 조식도 없었고 커피 음료, 물 등도 모두 유료였다. 또한 조식을 예약한 승객에 한하여 제공되었다. 12명의 가족이 움직이는 가족 여행이었다. 부모님의 회혼을 기념하여 가족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전체 가족 20여명 중 거의 절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인원이었다. 대부분의 사위와 며느리가 빠졌고 아이들도 1/3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가족은 비행시간 동안 곯아떨어져 있었다. 다낭공항에 도착하니 현지 가이드 조가 마중을 나왔다. 참고로 한국가이드는 공항까지의 접근이 불허되었다. 베트남을 같이 여행할 일행을 기다리느라 한시간여를 공항 바깥에서 지루하게 기다려야했다. 한국가이드는 당연히 찻집에서 편안한 상태에서 일행을 기다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일행은 다른 비행기편으로 도착을 했고 같이 합류해서 버스로 이동했다. 120만명의 인구를 가진 다낭이었다. 호치민 시 등 베트남 4대 도시에 속했다. 맨먼저 일정으로 정해진 곳은 식당이었다. 현지식이었고 메뉴는 월남쌈과 쌀국수였다. 독특한 향을 풍기는 고수는 없었다. 식사 후에는 곧바로 미케비치에 있는 커피숍에 갔다. 미케비치는 세계 6대비치에 속하는 곳이었다. 망고쥬스와 수박쥬스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과 해변의 모래밭 백사장에 들어갔다. 야자수가 서있었고 바람이 다소 불었지만 그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드넓은 해변 백사장에 해수욕객은 없었다. 거의 현지인이나 대분분의 수영객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때를 이용하고 있었다. 가뭄에 콩나듯이 보이는 해수욕객은 외국인 뿐이었다. 모래를 밟은 후에는 모래를 털고 승차해야 한다는 주의를 주었다. 어느정도 현지 적응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한국과 시차도 2시간이 있었다. 본격적인 관광으로 시작된 것은 영응사라는 사찰이었다. 다낭시의 앞바다가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될 때 수많은 보트피플이 수장되었다. 그 때 살아남은 이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후 2000년대 이후에 절을 세우고 해수관음상(68m 건물 30층높이)을 세웠다.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축원하기 위해서였다. 이후부터 태풍피해도 줄어들었다는 얘기였다. 해수관음상앞에는 포대화상이 위치해 있었다. 불룩한 배를 내밀고 있는 포대화상의 형상은 동방의 산타크로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산속에서 수행을 한 포대화상은 지상으로 내려올 때 포대자루를 들고 내려와 산속에서 가져온 약초 산나물 등을 갖고와서 일반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해수관음상은 손에 호리병을 들고 있는데 목마른자와 고통받는자를 치유하는 목적으로 들고 있다. 영응사의 마당 곳곳에는 분재형식으로 많은 분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날씨가 무더운 탓에 필히 양산, 부채, 손선풍기 등을 갖고 있어야 했다. 장인 장모님 등은 시원한 대웅경내에서 휴식을 취했고 우리부부만 사진촬영을 하며 돌아다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성당이었다. 프랑스가 식민지로 경영하던 시절인 1923년에 건립한 성당이었다. 핑크성당이라고도 하고 첨탑(70m)위에 수탉모형처럼 생긴 것이 있다고 해서 수탉성당이라고도 불렸다. 서양의 대성당이나 우리의 명동성당과는 규모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고 습도가 높아 계속 관광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급하게 장인어른이 혈압약을 찾기도 했다. 세 번째로 방문한 관광지는 카오다이교 사원이었다. 남녀가 각기 따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마호메트교를 통합한 민족종교라 했다. 우리로 얘기하면 천도교와 유사했다. 2-3백만명의 신도를 갖고 있었다. 내부에는 지구본 형태의 모형이 있었고 그곳에는 눈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가이드가 잘 살펴보라고 했고 왼쪽눈인지 오른쪽인지를 알아오라고 과제를 주었다. 눈은 왼쪽이었다. 위에는 공자, 예수, 마호멧, 부처, 노자 등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다음은 맛사지숍이었다. 스톤 맛사지를 받았다. 한시간 30분간이었다. 맛사지를 받았더니 여행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어제 저녁부터 밤잠을 설쳤고 새벽같이 길을 나섰던 탓에 모두들 피곤해 했는데 그런대로 원래대로 기운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다음 일정은 저녁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아리랑이라는 한국식당이었다. 한국인이 2천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한국 식당도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상추, 고추, 마늘에 제육볶음이 나왔다. 북한식당은 있는지 물었는데 없다는 답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들어왔다. 체크인을 한 것이다. 케리어는 호텔보이가 운반해 주었다. 샤워를 하고 짐정리를 했다. 그리고 스카이 라운지로 올라갔다. 8시부터 불꽃놀이 행사를 한다고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었다. 맥주와 안주를 시켜놓고 다낭의 야경을 즐겼다. 아이들은 실내 수영장에 흠뻑 빠졌다. 서울의 야경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야경구경을 마치고 호실로 내려오려는 찰나에 불꽃이 터졌다. 그렇게 높게 쏘지는 않았지만 화려한 불꽃쑈가 펼쳐졌다. 동영상을 촬영했고 한창 넋을 잃고 바라다 보았다. 첫날의 일정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2일차 [호텔조식 08:30 로비집결 후에로 이동 3시간 후에성관광(티엔무 사원 & 카이딘왕릉) 중식 궁중식 황궁터(모문& 태화전 & 자금성) 한국어 가이드 인솔(후에 전동카(6)이동) 다낭 귀환 석식(삼겹살) 4.20 장인어른 생신(유람선관광 취소)]

 

베트남 여행 2일차였다. 아침식사를 하러 11층으로 올라갔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 볶음밥, 흰죽 등이 있었고 베이컨, 소시지, 롤케이크, 과일, 커피, 음료 등이 있었다. 시리얼도 한쪽에 있었다. 과일로는 수박, 토마토 등이 있었고 파인애플, 열대과일 등이 비치되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투숙객이 한국인이었고 일부 외국인 또는 현지인이 있었다. 오늘의 관광은 후에성이었다. 다낭에서 120키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2시간 30분쯤 소요되었다. 15키로미터의 터널을 지났다. 맨먼저 간 곳은 후에성 티엔무사원이었다. 사원에는 틱광둑스님과 관련이 있었다. 1963. 6.11남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 정부가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불교탄압이 극에 달하자 소신공양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우리나라 불교가 고난의 때임을 보고 여래의 명명되는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불교가 멸망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 한 몸 불살라 제불에 공양하고 그리하여 불교를 지키는 공덕을 행할 수 있기를 기꺼이 청합니다.” 소신공양전 제자들에게 예언했다. “자신이 앞으로 넘어지면 흉할 것이니 해외로 망명하고 자신이 뒤로 쓰러진다면 우리의 투쟁은 승리하고 평화를 맞이할 것이다.” 실제로 스님은 뒤로 쓰러지셨다. 그분의 장례행렬에는 7km에 걸쳐 10만명의 군중이 뒤를 따랐다. 심장은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 그리고 스님을 따라 7명의 스님이 더 소신공양을 했다. 티엔무사원에는 틱광둑 스님이 소신공양을 위해 타고 가셨던 승용차가 비치되어져 있었다. 다음의 관광지는 카이딘 왕릉이었다. 세금을 걷어 왕릉을 만드는데 쓰는 바람에 국민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던 왕이다. 화려한 장식과 호화로운 왕릉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포즈를 취했고 사진을 찍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석조물도 문무백관의 도열해 있는 모습이 있었다. 말과 코끼리 상도 있었다. 후에성은 우리로 치면 경주나 부여 등 옛왕조의 도읍지와 같은 느낌과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중식은 궁중식이라 했다. 한쪽에는 복식이 마련 되어져 있었고 두사람의 식탁도 호화롭게 마련되어 기념촬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식사를 하고 들른 곳은 황궁터였다. 후에의 황궁터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서깊은 곳이었다. 전동카 6인승을 타고 이동을 했고 현지 가이드가 나왔는데 한국어를 잘했다. 아주 유머스러하게 해설을 했고 우리와 비교하면서 황궁터를 얘기했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문이 오문이었다. 중앙통로는 황제가 다니는 문이었고 양쪽 두문은 문무대신들이 그리고 나머지 문으로 궁인이 다녔다. 태화전, 자금성 등을 설명했고 한국의 경복궁 등과 유사하게 설명을 했다. 모형으로 된 조형물에서 설명을 장황하게 하기도 했다. 한국의 종묘같은 곳도 있었는데 10여명쯤의 황제를 모시고 있었다. 건물의 색조는 붉은 색을 띠었다. 일부는 훼손이 심해 아직까지 복원 중에 있었다. 규모로 봐서는 우리와 비할 정도로 커지는 않았다. 베트남의 지배를 받은 것은 중국의 지배가 거의 천년 이었다. 이후 20세기초 프랑스 지배를 받았고 1940년에서 45년까지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 해방이후에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월맹과 월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960년부터 75년까지 16년간 베트남 전쟁을 했다. 결국은 호지명이 이끄는 사회주의가 승리를 했고 통일을 이뤘다. 지금도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다만 전도는 불허되었다. 불교, 카톨릭 등 종교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개인에게 토지도 4미터 10미터의 땅이 분배되었다. 비가 내리는 때도 있어 우산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황궁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메뉴는 삽겹살이었다. 무한리필 삽겹살이었다. 김치도 나왔고 거의 한국식과 다를 바 없었다. 일정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은 장인어른의 85회 생신이셨다. 호텔에 부탁을 해서 케이크를 준비했다. 8808호에서 가족들이 모여 회합을 했다. 모두들 단체로 만든 가족 티셔츠를 입었다. ‘주씨네 아들’ ‘주씨네 둘째딸’ ‘주씨네 둘째사위이런식으로 명찰을 앞가슴에 새겼고 뒤쪽에는 부모님 사진이 인쇄되었다. 케이크를 놓고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고 장인어른의 소회를 들었다. 결혼 60주년 생신 85회를 맞으신 감회가 남달랐다.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 준 데 대하여 깊이 감사하며 세상을 살아왔다. 6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 어려움도 있었고 애환도 컸었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출가해서 가정을 이루었고 모두들 행복하게 삶을 영위해 가는데 감사한다. 지난 해 둘째 딸의 아들 승환의 결혼식 때 그런 얘기를 했다. 참으로 행복한 결혼식을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세상에 만쌍 중 한쌍이 될까 말까한 일이다. 양친부모의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한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 중에 축복이다.” 공식적인 생신행사를 마치고는 놀이판을 벌였다. 다음날의 집결시간은 1030분으로 충분하게 여유롭게 준비를 할 수 있었다.

 

3일차 [1030분 호텔로비 집결 - 호이안 이동 마블마운틴(오행산) 영웅사 - 중식 (뷔페식 현지식(조개탕, 쌀국수 등) 한식(비빔밥(가지나물, 콩나물무침, 모닝글로리 등) 오이냉채) 도자기 마을 투본강 투어 떤끼의 집 -광조회관 - 내원교 씨클로 관광 - 저녁식사 (현지식 반세오)-유람선 관광 -야시장 쇼핑(가방 모자)-호텔 맛사지]

 

아침식사를 뷔페식으로 하고 1030분에 로비에 집결해서 버스에 탔다. 그리고 다낭에서 좀 떨어진 호이안으로 이동해서 오행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고 영웅사를 둘러보았다. 날씨는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했다. 우산을 챙겨야 했다. 오행산과 영웅사를 둘러본 후 해안가로 갔다. 준비를 해야 했던 것은 논이라는 베트남 모자였다. 끈이 매달려져 있었다. 그리고 바구니 배에 두명씩 탔다. 50분쯤 탔는데 꽃무늬 또는 방아깨비 모양의 반지를 기념으로 나눠주었다. 줄로 한쪽편에 묶어놓고 신나게 춤추는 시간을 갖기도 했고 또 물가에서는 한 팀장이 나와 바구니 배를 신나게 돌리는 쇼를 선보였다. 모두들 팁을 내놓았다. 다음 일정은 식사였다. 현지식과 한식이 뷔페식으로 준비되어져 있었다. 입맛과 취향대로 였지만 대부분 한식을 선택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도자기마을이었다. 93세된 할머니 도공이 있었는데 지금은 병환중이셔서 다른 사람이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자신의 12간지에 맞는 모형을 하나씩 기념품으로 받았다. 참고로 베트남에서는 토끼띠가 없고 고양이띠로 변환되었다. 한쪽에는 기념품가게가 있었고 마을 한쪽해안가에는 가마와 원료적치장이 있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황토 원재료라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가마에 구웠는데 지금은 그대로 자연 건조해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다음의 일정은 배를 타는 것이었다. 2-30인승쯤 되어 보였다. 맥주 한캔씩과 음료 등이 제공되었다. 흥겨운 음악이 나오자 너도나도 나와서 춤을 추었다. 배에서 내려서는 중국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이 연결된 내원교라는 다리를 건넜고 떤끼의 집, 광조회관, 등을 둘러보았고 씨클로로 마을을 돌아보기도 했다. 자건거 앞에 인력거처럼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개조된 것이 씨클로였다.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했는데 관광에는 유용하게 활용되는 듯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가장 편안하고 건방진 자세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최종적으로는 걸어서 거리를 한바퀴 돌았는데 인파로 인해 걸어서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최종적으로는 가이드가 정해준 집결지에 모여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아주 근사한 현지식 식당이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집이었다. 반세오가 세팅되어져 있었다. 독특한 맛이었다. 야채와 고기가 적절하게 배합된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원등을 띄우기 위해 배로 갔다. 배를 타고 소원등을 물위에 띄웠다. 야경은 물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해냈다. 강변으로 관광객들이 넘쳐났고 배들도 곧잘 피해나갔다. 배끼리 서로 충돌할 것처럼 보였는데 다들 요리조리 잘 비껴갔다. 4인이 1조가 되어 배에 탔다. 다음은 야시장 구경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먹을거리도 넘쳐났고 모자 가방등 가게들도 즐비했다. 베트남의 전통복장은 아오자이였다. 여자들이 입는 복장이었는데 한때는 아오자이를 입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자유로워졌다. 너도나도 자매들이 아오자이와 속바지를 구입하기도 했다. 지윤의 속바지를 챙겨오지 않아 다시 상점을 찾기도 했다. 값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1달러에 모자를 팔기도 했고 어느곳에서는 3달러라고도 하니 장단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야시장 쇼핑을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일단호텔 인근의 다른 호텔에서 맛사지를 받는 인원이 10명이었다. 아이들과 막내처제 그리고 나만 남았다. 버스는 맛사지를 받는 호텔에 10명의 인원을 내려주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7명의 짐을 옮기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두시간 정도의 시간이 휴식시간이었다. TV는 코메디가 나오는 채널 하나만 한국어로 방송을 했다. 드라마는 한국드라마인데 더빙을 해서 베트남어로 방송이 되었다. 아리랑 TV는 그대로 영어로 나왔다. 호텔에는 와인도 두 병이 비치되어져 있었다. 비데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나 세척할 수 있도록은 되어있었다.

 

4일차 [ 호텔조식- 단체기념사진 촬영 - 08:00 호텔로비 집결 - 바나힐로 이동 - 케이블카 승탑- 환승 - 케이블카 - 바나힐 관광(아이들 놀이동산, 자이드롭. 밀랍인형관)- 중식(돌솥밥)- 쇼핑(보석상, 침향과 니노, 잡화점) - 유람선 -공항 이동 -- 탑승(23:45)]

 

베트남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체크아웃을 해야했다. 빠뜨린 것은 팁이었다. 짐을 들고 나오느라 깜빡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캐리어를 로비까지 옮겼다. 호텔보이가 캐리어를 차에 실어주었다. 기념촬영을 했다. 가족이 맞춘 기념 티셔츠를 입고 호텔입구에 모였다. 처음에 기념단체

촬영을 했고 다음 포즈는 손가락으로 하트모형을 만든 후 했고 세 번째는 등을 보이도록 했고 마지막 포즈는 파이팅으로 했다. 다시 8808호로 몰려가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내려갔다. 깜빡한 팁은 문틈으로 집어넣었다. 마지막날의 마지막 일정은 바니힐이었다. 1500m 고지대에 위치한 베트남 속의 유럽이라는 별칭이 있는 곳이었다. 정확한 높이로 1487m고지대였다. 40분쯤 버스로 이동해서 그곳에 도착했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었다. 중국의 장가계 다음으로 긴 케이블카였다. 엄청난 인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날 우천으로 인해 일정이 밀렸고 한꺼번에 몰린 듯했다. 케이블카로 이동해서 입구까지 가이드가 안내를 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래쪽으로 몰려갔고 어른들은 위쪽으로 이동했다. 완전 유럽의 어느 성에 와 있는 듯했다. 더위도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보라가 일었다. 아직도 곳곳에서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꽃들도 즐비했다. 문주란도 있었고 이름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성당도 있었고 바베큐점도 있었다. 입구에서 바베큐의 공짜 맥주 티켓을 받아오기도 했다. 흑맥주 500cc티켓이었다. 전망대까지 올라갔더니 종이 있었고 높은 탑도 있었다. 어떤 사원에 온 것같은 느낌을 주었다. 포대화상도 있었고 금강역사같은 것도 탑 사면에 세워져 있었다. 노승같은 분들의 조각상도 10여개 놓여져 있었다. 일정한 시간대 별로 자동으로 종이 울리도록 되어져 있었다. 종의 주위에는 돈들을 꽂을 수 있도록 줄이 있었다. 거의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중간 중간에는 호텔도 있었고 성당도 있었고 음식점도 있었다. 입구에는 사무라이로 분장한 서양인이 칼을 들고 관람객들과 기념촬영의 모델로 응해주고 있었다. 한켠에는 모금함이 있었다. 광장 한쪽에는 밴드연주가 있었다. 색스폰, 나 팔, 드럼 등으로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워낙 인파가 많아 혼잡하고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12시까지 집결하도록 예고되었다. 40분쯤을 남기고 바비큐점으로 들어갔다. 먼저 흑맥주를 받아서 테이블로 갔다. 그리고 안주를 주문했다. 치킨, 샐러드, 소시지 김치 등이 나왔다. 감자튀김은 추가로 시켰는데 포장을 했다. 포장을 한 것은 아이들용이었다. 맥주를 마신 탓에 허기는 다 채운 셈이었다. 이제는 집결해서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 아이들에게 햄버그와 꼬치를 사주었고 아이들은 그것으로 요기를 했다. 바나힐을 내려와서는 곧바로 중식을 하러갔다. 돌솥밥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다낭으로 돌아와 쇼핑을 하러 다녔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식사는 샤브샤브였다. 식사를 마치고 유람선을 타러갔다. 야경이 눈부셨다. 맥주를 한 캔씩 주었고 음료수도 있었다. 안내방송은 없었고 음악만 경쾌하게 나왔다. 모두들 흥겨운 기분에 사로잡혀 몸을 흔들었다.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관광의 마지막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공항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가이드와 작별을 고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맨먼저 한 일은 캐리어 짐을 다시 꾸리는 것이었다. 가이드가 지적한 대로 액체 등 통관절차 전에 짐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비행편은 1145분이었는데 연착이 되었다고 해서 015분으로 고지가 되었다. 짐을 부치고 발권을 받아 출국수속을 했다. 그리고 게이트 입구까지 이동했다. 집사람을 억지춘향식으로 충동질해서 면세점의 눈요기만 하러갔다. 아이들도 같이 동행했다. 별로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킬만한 것은 없었다. 의자에 누워 눈을 좀 붙였다. 게이트에 들어오고 났더니 다시 항공편이 정상적으로 운행이 된다는 얘기였다. 한켠에는 안마의자가 있었다. 2만동을 넣으면 6분간 안마가 되었다. 식구대로 안마를 받았다. 드디어 탑승절차가 시작이 되었다. 결국 지연은 되었다. 거의 자정무렵에 이륙이 시작되었다. 한국에 도착하니 거의 6시경이 되었다. 입국절차를 밟았고 짐을 찾았다. 마지막 해단식은 장인 어른의 말씀으로 종료되었다. 이제는 광주팀은 기영이 차로 내려갔다. 대전팀은 각자 대전행과 세종행 버스로 이동을 했다. 서울팀은 택시로 곧장 귀가했다. 35일간의 베트남 가족여행 일정이 끝났다. 가족 구성원이 다 취향도 틀리고 개성도 구구각색임에도 여행기간 동안 서로를 배려하고 인내하므로써 원만하게 여행일정을 무난하게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아이들도 잘 따라주어 큰 무리없이 35일 간의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무더운 날씨였고 간간히 비도 내려 불편하기도 했지만 각자 각자가 다 협조하고 뜻을 모아서 즐겁고 유쾌한 가족여행을 만드는데 일조한 듯했다. 몹시도 피곤했고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녹초가 되기도 했지만 가족간의 우의를 돈독히 할 수 있었던 유익한 여행이었고 기분좋고 즐거운 가족여행이 되었다. 장인 장모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컸었던 듯하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시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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