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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252

93. 기억 속의 들꽃 기억 속의 들꽃-윤흥길 한 떼거리의 피난민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 소녀는 마치 처치하기 곤란한 짐짝처럼 되똑하니 남겨져 있었다. 정갈한 청소부가 어쩌다가 실수로 흘린 쓰레기 같기도 했다. 하얀 수염에 붉은 털옷을 입고 주로 굴뚝으로 드나든다는 서양의 어느 뚱뚱보 할아버지가 간밤에 도둑처럼 살그머니 남기고 간 선물 같기도 했다. 아무튼 소녀는 우리 마을 우리 또래의 아이들에게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발견되었다. 선물치고는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망측스러웠다. 미처 세수도 하지 못한 때꼽재기 우리들 눈에 비친 그 애의 모습은 거의 거지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우리들 역시 그다지 깨끗한 편이 못 되는데도 그랬다. 먼저 쫓기는 사람들의 무리가 드문드문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포성이 울렸다. 돌산을 뚫.. 2022. 2. 26.
92. 그림자 그 림 자 유재용 시외버스 터미널에 이르러 매표구 앞에 설 때까지 장 순구는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왜였다. 알 만한 지명과 그것들보다 훨씬 많은 생소한 지명들이 매표구 위에 각기 운임표를 매단 채 겨루듯 늘어서 있었다. 정해진 금액을 구멍 속에 집어넣어라. 그러면 일정한 행로를 거쳐 예정된 시간이 흐른 뒤 당신이 원하는 어느 고랑 어느 산천 속에 몸과 마음을 담그게 해 주겠노라 사람들은 그런 유혹에 넘어가듯 반월형의 매표구 속에 돈을 집어넣고는 차표를 받아 쥐곤했는데, 마치 환상여행을 즐길 수 있는 전자오락기의 동전투입구에 집어넣을 동전을 구입해 손에 넣는 행위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그런 연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자오락실에 들어가 본 것은 퍽 오래전 일이었다. 조 근식을 따라서.. 2022. 2. 26.
91. 귤 귤(橘) -윤후명 그의 전화를 받고 나자 나는 오직 그냥이라는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냥이라고 말했다. 만나고 싶었어요, 그냥. 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그냥이라고 하는 말투를 들으니 저항감이라기보다 연민이 앞섰다. 그는 수화기 속에서 가물거리는 소리 로 덧붙여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얼마나 찾았던지요. 그 목소리는, 드디어 나를 찾아냈다는 반가움에 떨면서 무언가 긴장된 목소리였다, 나는 감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숨기기 위해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건성으로 응답했다. 정말 그렇군.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지 ? 그는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준비라도 한 듯이 당장은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내일 마침 일요일이니가 내일 만나. 토요일인데도 급히 해야 할 일이 .. 2022. 2. 26.
90. 고목 고목(古木) 유재용 아버지는 여든 다섯 살이 되도록 꿋꿋했다. 지팡이가 소용없었고 고두밥이라야 좋아했다. 꼬장꼬장한 허리와 휭하니 내닫는 걸음걸이, 똘똘 뭉쳐 나오는 힘찬 말소리를 대하며 사람들은 저 노인네 백 살은 몰라도 아흔 아홉 살까지는 끄떡없이 버틸 거야 하고 말했었다. 그러면서도 며칠 사이에 아버지의 안부를 묻곤 하는 것은 노인네 일이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꿋꿋해 보이는 노인네일수록 하룻밤 사이에 털썩 쓰러져 버리기 일쑤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태나듯 무너지지는 않았다.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다리가 저리구 땡긴다." 이렇게 붕괴가 시작되었다. 혈관이 굳어지는 조짐이라고 했다. 그렇게 이삼 년 끌어간 뒤 기억력의 뚜렷한 쇠퇴 현상이 나타났다. 오늘이 며칠이냐, 무.. 2022.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