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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122

121. 피하의 안개 파 하 의 안 개 –호영송 말(言)은 고작 엉성한 그물에 불과합니다. 그 그물로 행위 또는 행위의 진실을 건지려고 했을 때 잡으려던 고기(魚)는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손을 그릇 삼아 샘물을 떠 마셔 본 적이 있으시죠? 물은 이미 손가락 틈으로 다 새어 나가고 아주 조금의 물이 입술과 혀를 축여 줄 뿐 아닙니까. 네? 말의 유희(遊戱)라고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점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혓바닥과 입술을 나불대어 또는 종잇장 위에 펜으로 뭘 좀 끄적끄적해 보았자, 고트프리트 벤이 그의 시행(詩行)을 재주껏 전개시켜 보았자 그의 시행들은 그의 독자들에 의해서 말장난이라고 걷어 채이고 마는 일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고트프리트 벤의 정신의 진실은 어디 있겠으며 그의 행.. 2022. 4. 8.
120. 잔등 잔 등 (殘燈)-허준 장춘서 회령까지 스무하루를 두고 온 여정이었다. 우로를 막을 아무런 장비도 없는 무개 화차 속에서 아무렇게나 내어 팽개친 오뚝이 모양으로 가로 서기도 하고, 모로 서기도 하고, 흑은 팔을 끼고 엉거주춤 주저앉아서 서로 얼굴을 비비대고 졸다가는 매연에 전 남의 얼굴에다 건 침을 지르르 흘려주기질과 차에 오를 때마다 떼밀고 잡아채고 곤두박질을 하면서 오는 짝패이다가도 하루 아침 홀연히 오는 별리(別離)의 맛을 보지 않고는 한로(寒露)와 탄진(炭塵) 속에 건너 매어진 마음의 닻줄이 얼마만한 것인가를 알고 살기 힘든 듯하였다. 이날 아침, 방(方)과 나는 도립병원 뒤 어느 대단히 마음 너그러운 마나님 집에서 하룻밤을 드새고 나왔다. 아래윗방의 단 두 칸 집인데 샛문턱에 팔고뱅이(팔꿈치)를 .. 2022. 4. 8.
119. 이리도 이리도 -황순원 중학 이년에서 삼 년에 걸친 한 일 년 동안 아는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대개 그 때 한 반 동무로 이웃에 이사해 온 만수라는 애네 집에서 살다시피 한 일이 있다. 이웃이었으니 필시 이 애도 우리 집에 찾아왔을 것인데 지금 내 기억으로는 암만해도 내 편에서만 그 애네 집에 찾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떤 까닭일까. 만수는 어머니와 다만 둘이서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만수 아버지는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고무 공장 사장으로 작은집을 얻어 딴살림 차려 놓고 큰집과는 영 발을 끊은 듯했다. 나는 이 만수 아버지라는 이를 만수가 이웃에서 떠나기 직전, 그러니까 우리가 삼 학년이 되던 해 늦봄, 만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마당에서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것도 누가 만수.. 2022. 4. 8.
118.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현진건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 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 2022.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