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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122

112. 사제와 제물 사제와 제물 현길언 1 목사가 그의 자리에서 수청 기생이 따라주는 술잔을 기울이다가 보드라운 계집의 살결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심란한 타관의 객고를 풀려고 할 즈음에 호방이 주책없이도 황겁스레 달려들었다. 주저주저하며 얼른 말머리를 열지 않는 호방의 시원찮은 표정에 목사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데도 호방은 주위를 흘끔흘끔 둘러보며 송구스러운 듯이 꾸물거리기는 하면서도 찾아온 용건을 얼른 꺼내질 않았다. 며칠째 불어대는 진눈깨비 섞인 높새바람이 타관에 와 있는 목사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던 요 며칠이었다. 더구나 밤마다 머리맡과 맞닿아 있는 갯가에서 들려 오는 파도소리와 물결에 씻겨 내려가는 자갈소리에 며칠을 불면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파들파들 뛰는 계집의 몸뚱어리도 밤중에는 징그러운 구.. 2022. 4. 8.
111. 사공과 뱀 사 공 과 뱀 -홍성원 차가 산굽이를 홰 돌더니 밤나무가 길게 늘어선 제방 위로 올라선다. 바다다. 매미 울음소리가 귀청이 따갑도록 요란하다. 작은 포구(浦口) - 상앗대가 가로놓인 전마선 네 척이 입 구(口)자의 잔잔한 포구에 그림처럼 묶여 있다. 차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나와 그이 두람뿐이다. 이곳 주민들이 대부분인 승객들은 바다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이 삶의 터전이고 우리는 이곳에 휴가차 찾아 온 피서객인 탓이다. 포구 바깥에는 돛배 두 척이 팽팽하게 바람을 받고 어딘가로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다. 버스가 계속 제방 위로 달리고 있어서 배들은 전혀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그 너머로는 곶인지 섬인지, 남빛 바다 위로 많은 육지들이 듬성듬성 떠 있다. 마침 물이 나간 .. 2022. 4. 8.
110. 빛 기둥의 출구 빛 기둥의 출구(出口) -황충상 나는 촉광이 밝은 백열 전구를 머릿속에 켜고 네모난 방 그 한쪽 벽에 잇대인 침대 위에 누워 있습니다. 모든 나의 의식은 보이는 사실, 느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무관한 듯하면서도 막연한 어떤 힘의 작용으로 겁먹고 있습니다, 이윽고 바람이 천정으로부터 쏟아져 내립니다. 천정엔 아무리 찾으려 해도 구멍 하나, 틈새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은 마구 쏟아져 내립니다. 여기서 보이는 사실을 어떻게 믿으며, 또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수없이 생각을 바꿔봅니다. 아마 바람이 몹시도 외로운가 보지요. 정말 그래서인지 바람은 내 가슴에 가을 햇살처럼 켜를 이루고 있는 빛을 날리며 동심(童心)처럼 장난을 겁니다. 「나는 이 빛깔을 알아. 이 빛깔의 냄새, 사람들은 이 냄새.. 2022. 4. 8.
109. 빈처 빈처(貧妻) -현진건 1 「그것이 어째 없을까?」 아내가 창문을 열고 무엇을 찾더니 입안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없어?」 나는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장만 뒤적뒤적하다가 물어보았다.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았는데.」 「……」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을 하려는 것을 앎이라. 오늘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이 2년 동안에 돈 한푼 나는 데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典當局) 창고에 들여 밀거나 고물상 한구석에 세워두고 돈을 얻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다.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 폈던 책을 덮으며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봄은 벌써 반이나 지났건마.. 2022.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