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단편소설2122

117. 어둠 속에 찍힌 판화 어둠 속에 찍힌 판화(版畵)-황순원 우선 이사가는 곳이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그만하면 방도 깨끗한 편이었다. 한 칸짜리 이 뜰아랫방이 먼젓 변호사 댁 헛간보다도 작은 것이 좀 안됐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방에는 전등을 끌어들인 흔적이 없었다. 그것도 별수 없는 일이다. 헛간에서 살 때와 마찬가지로 해 있어 저녁을 해치우면 그만일 것이다. 가던 날로 우리는 어둡기 전에 저녁이라고 한 술 끓여 먹은 후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밑으로 두 애는 벌써, 그리고 위로 두 애는 아까 낮에 못다 판 신문을 저녁 먹고 다시 안고 나가더니 좀 전에야 돌아와 그들도 한구석에 구겨박혀 잠이 든 모양인데. 나는 어둠 속에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자꾸 무엇에 쫓기는 심사였.. 2022. 4. 8.
115. 술 권하는 사회 술 권하는 사회(社會)-현진건 『아이그, 아야.』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 손가락 손톱 밑을 찔렸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櫻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그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아내는 얼른 바늘을 빼고 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누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던 일가지를 팔꿈치로 고이고이 밀어 내려놓았다. 이윽고 눌렀던 손을 떼어 보았다. 그 언저리는 인제 다시 피가 아니 나려는 것처럼 혈색(血色)이 없다. 하더니, 그 희던 꺼풀 밑에 다시금 꽃물이 차츰차츰 밀려온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상처로부터 좁쌀낟같은 핏방울이 송송 솟는다. 또 아니 누를 수 없다. 이만하면 그 구멍이 아물었으려니.. 2022. 4. 8.
114. 소나기 소나기-황순원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 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 2022. 4. 8.
113. 삼포가는 길 삼포(森浦) 가는 길 -황석영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 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 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현장 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2022.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