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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631

사랑 사랑 / 조명숙 마을 어귀에 자동차를 세웠다. 훅 달아오른 한여름 무더위를 밀치고 내리려는데 발밑에 검은 물체가 엎뎠다. 반사적으로 발을 안으로 들이는 순간, 그 물체는 일어섰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늙었지만 낯익은 모습이다. 시고모님을 뵈러 온 길에 내 차 소리를 알아듣고 마중 나온 건 까미였다. 몇 년 만의 해후다. 고모님 댁은 수안보 면이다. 면에서도 골짜기로 쑥 들어가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면 산봉우리에 집 몇 채가 희미하게 걸려있는 동네다. 구곡양장의 좁은 길을 한동안 올라야 닿는다. 거기서도 윗집이어서 하늘을 이고 서면 선인이 된 듯 고통이나 질병 없이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천혜의 자연을 품은 곳이라 그런지 고모님은 이곳으로 시집와, 구순에 이르기까지 무병장.. 2023. 10. 7.
한 알의 씨앗일지라도 한 알의 씨앗일지라도 / 김경자 - 제40회 영농수기 가작 강원도 영월에 아름다운 부부가 산다. 사람에 대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말하라면 나는 단연 사람다움을 들겠다. 사람다움이란 게 추상적이긴 하지만 따뜻하고 성실하며 배려와 사랑을 마음 바탕에 깔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녀 ‘조금 젊은 아낙’의 블로그에 처음 들어갔을 때 사람이 무척 순수하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래서 말을 걸었고 뒤이어 그녀의 소박하고 성실한 일상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암에 걸렸다고 했다. 그런데 암이라는 병을 말하는 그녀가 어찌 그리도 담담한지,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세상이 샛노랗게 변하고 주위 모든 게 암흑이 되었을 텐데 참으로 침착하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농수기를 읽고 나서 그게 .. 2023. 10. 7.
맛글 맛글 / 설성제 딸과 함께 명태 요리집 ‘맛태’에 들렀다. 명태는 비린내가 덜하고 담백한 맛으로 일품이다. 북어나 황태를 물에 불려 양념장을 바른 구이가 입에 착착 감기는가 하면 간장에 졸인 달짝지근한 코다리 조림도 그만이다. 무를 숨벙숨벙 삐져 넣은 시원한 탕도 속을 풀기에 한성맞춤이다. 어쩌면 그 무엇보다 이릴 적 가장 많이 맛 본 생선이라 내 안에 최고의 어물로 자리 잡은지도 모른다. 막상 자신 있게 할 줄 아는 명태요리는 없다. 간단한 전이나 북어국 정도가 전부다. 그러니 여기저기 명태를 취급하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먹고선 맛을 평하며 요리법을 논하다 입을 닦으며 씩 일러나곤 한다. 식당이 왁자하다. 한 뼘 떨어진 옆 테이블에서 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독서에 관한 내용이다. “이번에 ‘이상 문학상’.. 2023. 10. 4.
물 때 물 때 / 장금식 - 제11회 정읍사문학상 최우수상 물이끼 같은 물때다. 집중적으로 내린 장맛비의 폭격에 마음을 드러낸 색. 막지 못한 비바람, 부조화와 불균형의 연결고리에 마지못해 끼어있는, 못내 아픈 풍경의 색이다. 진하고 연한 초록과 거뭇거뭇하고 우중충한 초록 바닥이다. 자연 속, 큰 바위틈에 낀 녹색 이끼를 보면 절벽 모습이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까, 신의 조화라며 감탄을 연발할 텐데. 단독주택 시멘트 바닥 마당에 낀 물때는 미와 조금 거리가 멀다. 지우고 싶다. 깔끔한 성격 때문이 아니고 색에 대한 어떤 편견 때문에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여주기 싫은 내 상처의 환부 같아서다. 그러나 추하고 보기 싫은, 흉한 것에서도 미를 찾아내는 예술가도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뜻 보면 흙.. 2023. 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