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 631

아무르와 디그니타스 아무르와 디그니타스 / 오차숙 영화 《아무르》를 감상했다. 몇 년 전 광화문 시내큐브에서 접한 적도 있었지만, 며칠 전에는 EBS를 통해 재차 음미할 수 있었다. ‘아무르’는 그 어떤 작품과는 달리, 주인공 ‘안느’의 쓸쓸한 모습이 많은 여운을 주며 잡다한 생각을 하게 했다. 쓰나미처럼 엄습하는 나이 탓도 있으렷다. 안느가 남편 조르주와 마주 앉아 식사하던 중,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장면부터 시작해 일상의 삶이 무너져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생각의 쓰나미로 몰아치게 하며 발바닥까지 축축하게 했다. 죽음을 향해 허물어져 가는 그 과정들이, 정신없이 달려가는 순간의 삶보다 100만 배쯤 어렵다는 생각에 닿게 되자 거실의 먼지까지 애련하게 느껴졌다. 두 주인공의 삶은 곧 우리들의 일상이 되어 극복해 가야 할.. 2023. 8. 17.
육안과 심안 육안(肉眼)과 심안(心眼) / 박연구 소지품 하나를 사려고 해도 백화점에 가서 그 많은 물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게 마련인데, 하물며 평생의 반려가 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맞선도 보지 않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결혼을 한 바 있는 나 역시 소위 맞선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본 경험이 있다. 당시 나는 잠재 실업자라 할까.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문학이란 것을 한답시고 향리에서 뜻없는 일월만 허송하고 있었으니, 신랑 후보로서는 어느 모로 보나 탐탁치가 못했다. 와병 중이신 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맏며느리라도 보고 싶다고 어떻게나 성화이신지, 전혀 타의의 결혼을 하게 되는 처지이기는 해도 선을 보는 데마다 성사가 되지 않고 보면 매.. 2023. 8. 17.
두만강 푸른 물결 두만강 푸른 물결 / 서영화 비포장도로를 접어들어 한참 왔으나 보이는 거라곤 산과 나무, 억새를 헤집고 나는 잡새뿐이다. 초행길이라 간혹 사람 구경이라도 하면 심심치 않으련만 갈수록 적막강산이었다. 그나마 눈에 선선히 들어오는 것은 하늘을 받치려는 듯이 생생하게 자라는 자작나무였다. 좀 더 가니 벌목하는 늙수그레한 남자와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보인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그들은 우리 버스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가이드는 엉거주춤 일어나 도문에 곧 도달한다고 방송한 후, 바로 앞에서 중국 수비 대원이 검열하니 앉은 채로 조용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다. 성냥갑만 한 초소 앞에서 서성이는 군인 두 명이 버스를 유심히 쳐다본다. 버스가 멎자, 가이드는 얼른 내려가 군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바짝 .. 2023. 8. 17.
죽 / 김영희 고뿔에 걸리신 어머님이 자리보전을 하고 누우셨다. 입천장이 까끌해 도통 음식 맛을 모르겠다더니 무심코 콩나물갱죽이 먹고 싶단다. 멸치 육수를 우려서 콩나물을 한 주먹 얹으니 말간 국물에서 지난날이 떠올려진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살림이 어려워 죽을 자주 끓여 먹었다. 겨울 낮이면 밥상 위에 죽이 흔하게도 올라왔다. 쌀이 부족하여 갖가지 나물을 넣은 잡탕 죽이었다. 그래도 형제들은 한 국자씩 퍼 담아 게 눈 감추듯 먹고는 더 먹으려 냄비에 코를 박았다. 후후 불어가며 뚝딱 먹고 나면 포만감이 밀려왔다. 엄마는 자주 죽을 내놓는 것이 안쓰러워 우리를 보고 부드러워 잘 넘어가며 소화도 잘 된다고 했지만 쌀독을 열어보면 이유가 있었다. 그러기에 어린 시절의 가난은 기억에서 애써 지워버리고 싶었.. 2023.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