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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203

194. 환상의 새 환상의 새 박경리 작년 여름, 그 새를 본 것은 세 번이었다. 금년에는 아마 그 새를 보지 못할 것이다. 처음 이사를 했을 때 쓰레기장이 되어 있던 곳이 이 집에서는 제일 아늑한 장소임을 깨달은 나는 나지막한 축대를 쌓고 잔디를 심었다. 둥그스름한 비탈은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서 잔디밭은 마치 야외무대처럼 해서 장작불 피워 놓고 탈춤을 추었으면 좋겠다고들 하였다. 인가하고도 먼 곳이어서 나는 곧잘 코피 잔을 들고 나와 책을 읽기도 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는데 바로 옆에 흙과 자갈에 묻혀 있는 것이 거대한 바위인 것을 발견했다. 흙을 걷어내었다. 바위 밑동도 파 내려서 바위의 본 모습을 드러나게 했더니 비가 오면 물이 흘러내려 바위 밑동 웅덩이에 괴는 것이었다. 날이 쾌청해지면 흙탕물은 맑아져서 허리를 .. 2022. 1. 20.
193. 홀로 걸어온 길 홀로 걸어온 길(아스팔트 킨트의 계보) / 전혜린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쓰일 수 있는 명칭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북의 끝인 신의주에서 보낸 2년간은 내 어린 나이와 함께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 때문에 고향이라는 글자를 볼 때면, 언제나 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신의주다. 초등학교 1학년을 수료했을 때 나는 서울을 떠나서 그곳으로 갔다. 신의주는 소위 신흥 도시로서 일본인들이 계획적으로 만든 합리적이고 관념적인- 지금 생각하면 숨 갑갑한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도로가 꼭 자를 대고 그린 듯 정확하고 구획이 정연했으며 집의 크기도 똑같았고 재료는 모두 붉은 벽돌이 사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한 것은 그 깨.. 2022. 1. 20.
192. 해가 떴다, 나도 이슬 차며 길을 나서야겠다 해가 떴다, 나도 이슬 차며 길을 나서야겠다 고은 《구호와 외침은 무성하지만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감성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 세상을 돌아볼 수 있는 사색이 필요한 시간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시와 부대끼고, 거칠 것 없는 열정으로 역사에 맞서온 고은 시인이 2008년 무자년(戊子年)을 맞아 독자들께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월 2회 선보이는 철학적 에세이 ‘고은의 지평선’. 한없이 감성적이면서도 질풍노도처럼 격렬한 고은 특유의 언어로 독자들의 잠자고 있는 사유의 세계를 흔들어 깨울 것이다.》 돌아보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더라. 내 생각 내 느낌들 또한 다 백일몽이더라. 감히 여기에 하나 더 한다. 어릴 때 학교 정문 앞 구멍가게 문방구에 들어가 얄팍한 공책 한 권을 샀을 때의 그 가슴 설레는 행복이 아직.. 2022. 1. 20.
191.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어령 나는 하나의 공간(空間)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조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宇宙)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 .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하나의 나뭇잎, 한 잎 한 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孤獨)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永源) 한 세월(歲月)과 무한(無限) 한 공간(空間)이 가로막고 있음을.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生存)의 의미를 향해 흔드.. 2022.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