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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203

190. 풍경 뒤에 오는 것 풍경 뒤에 오는 것 이어령 ​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와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 산모롱이를 끼고 굽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이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길'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그 길을 '지프'로 달리고 있었다.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 2022. 1. 20.
189. 진정한 행복 진정한 행복 장영희 가끔, 무심히 들은 한마디 말, 우연히 펼친 책에서 얼핏 본 문장 하나, 별 생각 없이 들은 노래 하나가 마음에 큰 진동을 줄 때가 있다. 아니, 아예 삶의 행로를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어느 잡지에서 목포의 어느 카바레 악단에서 트럼펫 연주를 하고 있는 있는 유 선생이라는 사람이 쓴 수기를 읽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절도, 강간 등 범죄를 짓고 10여 년간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아홉 번째 다시 감옥으로 후송되는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때 마침 라디오에서 김세화의 '눈물로 쓴 편지'가 흘러 나왔다.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가 없어요. 눈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눈물로 쓴 편지는 고칠 수가 없어요. 눈물은 지우지 못하니까요 ...'' 순간 애잔한 그 노랫소리가.. 2022. 1. 20.
188. 잠자리 전쟁 잠자리 전쟁 이어령 가을은 전쟁을 치른 폐허다.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몰한다. 하나의 모반(謀反), 하나의 폭풍. 들판의 꽃들과 잎과 열매와 모든 생명의 푸른 색채가 쫓긴다. 쫓겨서 어디론가 망명한 것이 아니라 가을은 그 자리에서 침몰한다. 고추잠자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름이 기울어가는 것이다. 잠자리들은 결코 소리를 내며 날지 않는다. 무슨 웃음소리를 내는 일도 없다. 그런데도 마을로 잠자리 떼가 모여들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꼭 숲 속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타나는 것 같다. 아이들은 댑싸리비를 들고 이 잠자리 떼를 쫓아다닌다. 밀려가는 잠자리 떼를 따라서 아이들의 패거리는 이동해간다. 파란 하늘 위에 너울거리는 투명한 잠자리의 날개에는 가을의 비.. 2022. 1. 20.
187. 자전거 여행 자전거 여행 – 프롤로그 김훈 나는 자전거가 좋다 어디를 여행하면 속도에 반비례로 사물과 교감한다. 비행기보다는 버스가,투어 버스보다는 로컬버스가, 버스보다는 자전거가, 자전거 보다는 걷기가 더 많은 사연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걷는 것은 한계가 있고 가장 적합한 수단은 자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게다가 자전거는 공해도 없이 자가발전 내 힘만으로 가는 것이니 다른 사람을 위협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페달을 밟는 대로 나아간다. 내 자전거 타는 실력은 일천하지만 자전거타기는 내게 활력을 준다. 씽씽 타고 가노라면 내가 자전거의 일부인지 자전거가 나의 일부인지 혼란스럽다. 김훈 말하기를 "빛과 바람에 몸을 절여가며 영일만 바닷가를 달릴 적에, 몸 속에서 햇덩이 같은 기쁨이 솟구쳐 올라."아아아" 소리치며 달렸다.. 2022.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