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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119

117. 한여름 밤에 한여름 밤에 노천명 앞벌 논가에서 개구리들이 소낙비 소리처럼 울어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 오는 저녁 마당 하 귀퉁이에 범산넝쿨,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로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다. 또한 거기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의 값진 여름 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달 아래 호박꽃이 화안한 저녁이면 군색스럽지 않아도 좋은 넓은 마당에는 이 모깃불이 피워지고 그 옆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여기선 여름살이 다림질이 한창 벌어지는 것이다. 멍석 자리에 이렇게 앉아 보면 시누이와 올케도 정다울 수 있고, 큰 애기에게 다림질을 붙잡히며, 지긋한 나이를 한 어머니는 별처럼 머언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함지박에는 가주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오란 강냉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2021. 12. 29.
116. 하나의 풍경 하나의 풍경 박연구 찌는 듯이 더운 날씨에 아이 할아버지는 웬 절구통을 사 오셨다. 메주콩도 찧어야 할 것이고 언제부터 벼르던 차에 좋은 돌절구통을 만났기에 들여온 거라 말씀하시기에 자세히 보니까 가짜 돌절구였다. 이 무거운 걸 버스 종점에서부터 메고 왔다는 인부에게 절구통값 오천오백원을 얼른 내주라고 하셨을 때도, 나는 차마 아버지께서 속으신 것이니 대금을 치르지 못하겠다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인부의 얼굴보다도 그처럼 좋아하시는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알려 드린다는 것이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니 계시니까 아버지가 어머니 몫의 배려까지 하시었다. 김장철이 임박하면 비싸니까 고추나 마늘을 미리미리 사 두라는 등 자상하신 데가 있었다. 절구통을 보니까 시골집의.. 2021. 12. 29.
115. 피딴문답 피딴문답 김소운 “자네, ‘피딴’이란 것 아나?” “피딴이라니, 그게 뭔데……?” “중국집에서 배갈 안주로 내는 오리알[鴨卵] 말이야. ‘피딴(皮蛋)’이라고 쓰지.” “시퍼런 달걀 같은 거 말이지, 그게 오리알이던가?” “오리알이지. 비록 오리알일망정, 나는 그 피딴을 대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절이라도 하고 싶어지거든…….” “그건 또 왜?” “내가 존경하는 요리니까…….” “존경이라니……, 존경할 요리란 것도 있나?” “있고말고. 내 얘기를 들어 보면 자네도 동감일 걸세. 오리알을 껍질째 진흙으로 싸서 겨 속에 묻어 두거든……. 한 반 년쯤 지난 뒤에 흙덩이를 부수고, 껍질을 까서 술안주로 내놓는 건데, 속은 굳어져서 마치 삶은 계란 같지만, 흙덩이 자체의 온기(溫氣) 외에 따로 가열(加熱)을 하는 .. 2021. 12. 29.
114. 플루트 연주자 플루트 연주자 피천득 바통을 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찬란한 존재다. 토스카니니 같은 지휘자 밑에서 플루트를 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다 지휘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 콘서트마스터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같이 하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에서는 한 멤버가 된다는 것만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각자의 맡은 바 기능이 전체 효과에 종합적으로 기여된다는 것은 의의 깊은 일이다. 서로 없어서는 안 된다는 신뢰감이 거기에 있고, 칭찬이거나 혹평이거나, ‘내’가 아니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자기의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이 얼마 아니 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독주하는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서운할 것은 없다.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 2021.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