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119

113. 풍란 풍란(風蘭) 이병기 나는 난(蘭)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기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한다.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건 서울 계동(桂洞)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중학교의 교.. 2021. 12. 28.
112. 풍경 뒤에 있는 것 풍경 뒤에 있는 것 이어령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와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꽃들이 피어있었다. 붉은 산모퉁이를 끼고 굽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그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 길’이라고 부른다. 그 때 나는 그 길을 지프로 달리고 있었다.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행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 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류나무가 서 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풀.. 2021. 12. 28.
110. 파초 파초 이테준 작년 봄에 이웃에서 파초 한 그루를 사 왔다. 얻어 온 것도 두어 뿌리 있었지만 모두 어미 뿌리에서 새로 찢어 낸 것들로 앉아서나 들여다볼 만한 키들이요 ‘요게 언제 자라서 키 큰 내가 들어선 만치 그늘이 지나!’ 생각할 때는 저윽 한심하였다. 그래 지나다닐 때마다 눈을 빼앗기던 이웃집 큰 파초를 그예 사 오고야 만 것이다. 워낙 크기도 했지만 파초는 소 선지가 제일 좋은 거름이란 말을 듣고 선지는 물론이요, 생선 씻은 물, 깻묵 물 같은 것을 틈틈이 주었더니 작년 당년으로 성북동에선 제일 큰 파초가 되었고 올봄에는 새끼를 다섯이나 뜯어내었다. 그런 것이 올여름에도 그냥 그 기운으로 장차게 자라 지금은 아마 제일 높은 가지는 열두 자도 훨씬 더 넘을 만치 지붕과 함께 솟아서 퍼런 공중에 드리.. 2021. 12. 28.
109. 특급품 특급품 김소운 일어(日語)로 '가야'라고 하는 나무 - 자전에는 '비(榧)'라고 했으니우리말로 비자목이라는 것이 아닐까. 이 비자목으로 두께여섯 치, 게다가 연륜이 고르기만 하면 바둑판으로는 그만이다. 오동으로사방을 짜고 속이 빈 - 돌을 놓을 때마다 '떵떵' 하고 울리는우리네 바둑판이 아니라, 이건 일본식 통나무 기반(碁盤)을두고 하는 말이다. 비자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두세 판국을 두고 나면 반면(盤面)이얽어서 곰보같이 된다. 얼마 동안을 그냥 내버려 두면반면은 다시 본디대로 평평해진다. 이것이 비자반의 특징이다. 비자를 반재(盤材)로 진중(珍重)하는 소이(所以)는, 오로지 유연성을취함이다. 반면(盤面)에 돌이 닿을 때의 연한 감촉 -, 비자반이면 여느 바둑판보다 어깨가 마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 2021. 12. 28.